5월 26일 (주일) | 성령강림절 후 제1주일 (제173일) 하느님의 형상

by 좋은만남 posted May 2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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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형상

독일에서 평화운동에 참여하고 있을 때 루터교의 한 친구가 나를 13세기 시토회 수도원으로 데려갔다. 오래 된 성당 벽에, 하느님과 교회에 관한 어떤 진실을 여실히 표현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전통 스타일 그대로 늙고 수염 난 남자의 모습을 한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가 한때 왕들이 지녔던 황금 공, 권력의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데 그것이 그의 손에서 막 빠져나오려 하는 중이다. 거기에서 나는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나와 파장(波長)이 같다는 첫 번째 단서를 얻었다. 어떻게 감히 하느님을 문책당하는(in charge) 분으로 생각한단 말인가? 예수께서 지혜롭게 말씀하셨듯이, 이 세상 임금은 문책을 당한다. 거짓말도 문책당하고 세상과 육신과 악마도 문책을 당한다. 하느님이 어렵게(hardly) 당신 길을 가신다. 하느님은 상처 입은 연인이고, ‘우리’가 쇼를 진행한다. 하느님이 권력 대신 사랑으로 놀이(to play)할 것을 결심하신 것은 엄청난 위험이 담긴 모험이었다.
아버지의 다른 손에는 칼이 들려있다. 내 생각에 그것은 현실이 제대로 되기를 명하고 기대하고 바라시는 하느님의 형상이다. 큰 기대를 담은 칼이다. 아버지 맞은편에 벌거벗기고 피 흘리는 예수가 있다. 그가 자기 옆구리 상처에 손을 대고 맞은편에 있는 아버지의 눈을 바라본다. 뜨겁게 서로를 이해하고 주고받는 눈길이다. 그 안에 커다란 힘이 있다. 아버지 손에 잡혀있는 바로 그 칼에 예수는 제어당하고 있다.
아버지는 당신 자녀들에게 그들이 되어야 하는 모든 것으로 되기를 바라고 명령하는 하느님, 요구하고 기대하는 하느님을 상징한다. 부모들은 어째서 때로 자녀들을 부드럽고 우아하게만 대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안다. 그들은 말한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아이들이 인생을 망치거나 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아이들을 이런 식으로 도와야 한다고,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사람들은 이것을 구약의 성난 하느님이라고 말한다. 옳은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기대하는 사랑, 앞으로 밀어주는 사랑, 거친 사랑의 모습이다. 반드시 필요한 사랑의 한 모습이다. 나는 그것을 사랑의 남성적인(masculine) 얼굴, 하느님의 남성적인 얼굴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예수는 우리가 성찬식 때마다 흠숭하는 상처받은 하느님, 잃어버린 하느님, 실패하는 하느님, 자기 길을 쉽게 가지 못하는 하느님, 부서진 하느님의 모습이다. 당신을 사랑에 빠뜨리고 세상의 고통에 빠뜨린 하느님, 그 하느님의 어린양이다.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완벽한 수평으로 칼이 존재하지만 둘은 사랑어린 눈길로 상대를 뜨겁게 바라본다. 대단한 형상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위치에서, 내가 이런 용어를 써도 된다면, 아들은 하느님의 약한 모습으로, 아버지는 하느님의 강한 모습으로, 상대를 완벽하게 받아들인다. 어쩌면 아버지는 능(能)의 무능(無能)이고 아들은 무능의 능일지 모르겠다. 무능의 능이야말로 정확한 예수의 형상이다. 그 둘은 서로를 보완한다.
그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칼 위로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있기 때문이다. 각자 서로 상대를 받아들이는 관계 속에 우리가 성령이라고 부르는 힘의 거대한 폭발과 해제(解除), 강함과 약함의 관계가 있다. 거기에 힘이 있다. 거기에 열정이 있다. 거기에 물이 있고, 거기에 숨이 있고, 거기에 공기가 있고, 거기에 바람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창조적 사랑과 긴장 안에서 교회가 태어난다. 
하지만 아직 완성된 그림이 아니다. 거기 커다란 여백이 있고 그 여백 저쪽에 여인이 있다. 말할 것 없이 마리아다. 그녀는 교회, 하느님 앞의 여성(feminine)인 교회다. 그냥 있게 하라(let it be)고, 일어나게 하라(let it happen)고 말하는 마리아처럼, 언제나 받아주고 믿어주고 잉태하는 교회다. 나는 그 교회를 신뢰한다. 마리아가 크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거기 서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건너다보고 있다. 얼굴에는 깊은 만족과 기쁨으로 피어난 위대한 모나리자의 미소가 있다. 그이는 당신이 보는 것을 사랑하고 그것을 이해하신다. 그것을 그냥 있게 하신다.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이는 신비와 패러독스와 더불어 사실 수 있다. 왼손으로 당신 옷자락을 잡고 있다. 그 옷자락 너머에는 수도원장, 추기경, 주교들이 한 무리를 이룬다. 그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들이다. 저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아무도 무엇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마리아는 옷자락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들에게 손짓하며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들아, 너희가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 같구나. 어쩌면 너희가 심연 속으로, 분명한 뜻이 잡히지 않는 곳, 시원한 대답들이 많지 않은 곳, 신비와 여정과 감동시키는 하느님만 있는 곳, 그 속으로 다이빙하는 대신 “이건 이것이다.” 또는 “저건 저것이다.”라고 설명하는 데 천 년쯤 더 세월을 보내야 할 모양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많은 정답을 주시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누구인지를 계속 말씀해주실 뿐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이 살아있는 곳, 하느님이 사랑 안에 계시는 곳으로 끊임없이 초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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