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2일 (수) | 성령강림 후 제3주 수요일 (제190일) 프란체스코의 가난

by 좋은만남 posted Jun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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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의 가난

프란체스코 영성은 결코 추상(抽象)이 아니다. 그것은 신학이 아니라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주신 구체적 가르침에 바탕을 둔다. 프란체스코주의는 쉽게 이데올로기 속으로 편입될 수 없다. 순수하고 간소한 생활, 이것이 몸으로 복음을 살아낸 프란체스코의 전부였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화육(化肉)이었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성령의 임재였다. 단순히 예수를 예배하기보다 예수로 존재하기였다. 무엇보다도 프란체스코주의는 그 한계를 부인할 수 없고 그 상처를 숨길 수 없는 살[肉]―벌거숭이 살―이다. 프란체스코는 그것을 일컬어 ‘가난’이라고 했다.
복음을 보는 이 순수한 시각이 프란체스코 당대의 교회와 선교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새로운 자유로 끌어당겼다. 당시의 종교집단들은 봉급과 특권과 비옥한 토지 소유 따위로 뒤엉겨 있었다. 구성원들 개인은 간소하게 살았지만, 단체들은 안락한 삶을 보장받고 있었다. 선교와 금전 사이의 이 위태로운 결합을 깨뜨리며 탁발승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프란체스코는 자기를 따르는 수도자들이 구원을 설교하기보다(실제로 그랬지만) 구원이기를 바랐다. 뒤따라올 위험과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간 예수를 본받아 그대로 살기를 바랐다. 오늘날에는 부랑자나 노숙자로 붙잡혀갈는지 모르지만, 예수께서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고 마시며 그 집에 머무르시오. 일꾼이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한 일이오.”(누가복음 10, 7)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씀에 담긴 뜻을 믿었고 그대로 살았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한 물품을 챙기지 말라고 하셨다는 설교를 처음 들었을 때 그는 기쁨이 충만하여 미사 도중에 밖으로 뛰쳐나와 그 말씀 전부를 암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말했다. “이게 내가 원하는 것이다. 이게 내가 동경하는 것이다. 이게 내가 온 몸으로 살고 싶은 바로 그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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