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9.10.12 20:04

2019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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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왕국절 제8주일 및 사회복지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의 통치가 성취되는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고 실천해 주십시오.

2. 오늘 오후에는 성서대학을 합니다. 성서학 개론으로 계속 강의합니다.

3. 성서대학을 마치고 김경수 임미화 집사님 가정에 이사심방을 하겠습니다. 원하시는 분은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4. 함옥분 장로님이 무릎 연골이 상하여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쾌유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5. 다음주일에는 서해안 무의도로 가을 야외예배를 갑니다. 아침 9시 30분에 출발하겠습니다. 아침식사는 따로 제공되지 않으며 음료수와 간식은 개인적으로 챙겨오시고 활동하기 편한 옷과 신발을 착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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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저모

다음주일에 무의도 야외예배를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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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회에서 친교문화위원회가 야외예배를 연2회로 하자는 의견을 내주신 것을 반영하여 이번에 가을 야외예배를 하겠습니다. 친교문화위원회가 제안한 장소는 무의도입니다. 인천공항고속도를 타고 가다가 공항 부근에서 빠져나가면 무의도로 갈 수 있습니다. 무의도는 트래킹코스, 등산코스, 산림욕장, 하나개 해수욕장, 해상탐방로 등이 있어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 좋은 환경이라고 합니다. 

다음 주일에는 각자 아침 시가를 하시고 모여 무의도에 도착하여 먼저 주일예배를 드린 후 점심식사로 준비해 간 김밥, 도시락 등을 먹은 후 다양한 오후 프로그램을 진행하겠습니다. 자세한 프로그램은 답사를 진행한 후에 다시 알려드릴께요. 그리고 인근 맛집에서 푸짐한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일정으로 계획 중입니다. 가을 단풍도 보고 즐거운 시간 보낼 수 있도록 섬기고 협력해주시고 개인 일정도 맞춰 많이 참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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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옥분 장로님이 무릎 치료를 받으셨습니다.

 

함옥분 장로님이 주일에 다리를 절룩이며 오셨습니다. 최근 몇 달간 무리를 하신 것 같다고 하십니다. 병원에 가보니 왼쪽 무릎 연골이 상해서 시술을 받아야 한다는데 장로님은 퇴행성 관절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오히려 웃으십니다. 장로님은 지난 월요일에 병원에 강남연세사랑병원에 입원하셔서 화요일에 시술을 받으시고 수요일에 퇴원하셨습니다. 치료도 잘 되었고 2주 후에 봉합한 실밥을 뽑고 보호대도 빼신다니 참 다행입니다. 쾌유를 위하여 기도 부탁드립니다. 

 

목회서신

 

 지난 주일에 있었던 가벼운 접촉사고

 

지난주일 아침, 예배당 앞을 정리하고 있는데 SUV 차량이 한 대 골목으로 들어와 예배당 앞에서 핸들을 돌려 나가다가 제 승용차의 뒷 범퍼를 긁었습니다. 그 운전자가 제대로 재보지 않고 그냥 지나가다가 벌어진 일입니다. 예순쯤 돼 보이는 운전자는 대뜸 '왜 좁은 골목길에 차를 이렇게 주차했느냐'고 말합니다. 저는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만 차분하게 '택배 트럭들도 잘 지나다니는 길이고 제 차는 경차인데, 본인 운전미숙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엊그제 앞 범퍼를 백만 원 들여 수리 받고 나왔다'라며 한숨을 쉬길래 제가 '남의 차를 긁었으면 먼저 사과하는 것이 기본 상식 아니냐'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제야 그 분 제 정신이 들어온 듯 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합니다. 20191013-06.jpg

사고부위는 전에도 다른 차가 창처 낸 부분이었지만 새로 긁힌 자국이 범퍼에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그분이 손수건을 꺼내 범퍼부분을 닦으니 범퍼가 까지고 긁히긴 했지만 심각한 상태는 아니어서 그냥 가시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고 갔습니다.

그분은 왜 그런 태도를 취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조금이라도 자기 책임을 줄이거나 회피하고 손해를 줄이기 위해 그랬을 것 같습니다. 사람은 이익과 손해 문제가 걸리면 이성을 상실하고 도발적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결국 돈의 문제인가 봅니다. 돈이 하나님보다 더 무서운 세상입니다. '내가 가해자였으면 나도 그랬을까'하고 자문해봅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에 받는 유혹이 큰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도를 잃지 않고 상식과 이성에 따라 괜한 감정 다툼 없이 차분하게 대응하도록 마음 써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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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위한 홍콩인들의 투쟁을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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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월, 홍콩인 찬퉁카이는 대만에서 임신한 여자 친구를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피하였지만 홍콩과 대만에는 범죄인 인도협정이 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홍콩 정부는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범죄인을 인도할 수 있는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홍콩의 야당과 시민단체는 중국 정부가 반체제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중국 본토로 송환하는데 이 법을 악용할 것을 우려, 강력반발하며 올해 6월 9일부터 시위를 시작하였습니다. 시위대는 최대 200만 명이 모였고 입법회(국회) 습격, 총파업 돌입, 공항 셨다운, 기자 폭행 등 양상으로 흘렀고 정부는 실탄을 발사하고 복면금지법을 발표하는 등 과잉 진압하였습니다. 체포된 2,400명의 3분의 1이 미성년자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18세 학생이 실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만삭의 여성이 체포되었으며 구치소로 끌려간 여대생들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민주적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홍콩인들의 투쟁은 지지와 연대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국가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을 탄압하고 권리를 제한하는 일이 세계적으로 만연합니다. 지금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권리를 지키려고 홍콩인들도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국가의 과도한 개입을 저지하고 자유와 권리를 지켜낼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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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25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26 밀이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27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28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였다.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하였다. 29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30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할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

마태복음 13:24-30(새번역)

 

사람이 붐비는 시내를 거닐다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을 목도하게 됩니다. 붉은색으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글귀가 무섭게 적혀있는 커다란 십자가. 그것을 어깨에 지고 가면서 사람들을 향해 소리 소리를 지르는 전도자(?)의 모습을 볼 때, 제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모든 사자성어가 그렇듯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짧은 문구에도 수많은 신학적 난제와 배경이야기들이 담겨있을 것인데, 그것을 저리도 짧고 단호하게 표현하는 ‘단무지’식의 행동이 한편으로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모해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길거리 전도자를 힐난하는 우리 스스로는 정작 천국에 대해 얼마나 명확한 상을 가지고 있을까요? 천국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근본적이면서도 결코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쳐 주신 ‘천국’의 이야기는 정말 소중합니다. 천국의 비유를 듣는 동안 우리 역시 당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제자들과 마을 사람들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천국의 열쇠를 보듬고, 확인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비유는 말 그대로 비유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동문서답 같기도 하고,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할 테지만, 그 이야기 사이사이에서 발견되는 천국의 흔적은 우리에게 분명한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언급하신 ‘첫 번째 천국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이전에도 비유가 등장하긴 하지만 “하늘 나라는~”이라는 주어로 시작하는 첫 번째 비유인 만큼 더욱 주목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서 천국(하늘나라)을 ‘사람’이라고 칭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냐면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천국이 꼭 공간적인 개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은 자기 밭에다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 즉 노동하는 사람, 노동자입니다.('천국씨'라고 부르고 싶네요.) 본문 이전에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비유풀이가 이미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옥토에 뿌려진 씨의 연장선상에서 이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앞서서는 옥토(좋은 땅)에 씨를 뿌려야 한다고 얘기하고, 지금 본문에서는 좋은 씨를 뿌려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천국씨는 좋은 땅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원수들이 숨겨 놓은 가라지가 섞여들어 올 수도 있지만 ‘천국씨’는 그것에 흔들리지 않고 열심히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짓습니다. 그러면 추수 때에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는 심판을 맞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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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것은 설사 가라지가 섞여들어 온다고 해도 천국씨의 일이 침해되거나 왜곡되거나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천국씨는 여전히 원래의 계획대로 좋은 땅에 좋은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해보게 됩니다. ‘천국씨'의 노동에 우리는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요? 천국잔치에 참여한다는 말은 천국씨의 노동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알곡을 저장하는 곳간이 천국인줄 알지만 성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요. 좋은 땅에 좋은 씨를 뿌리는 이 천국잔치에 당신도 참여하라고 말입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 천국을 노동자라고 설명하고 있는 지점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창세기에서 묘사하듯 노동은 에덴동산(천국)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에게 짐 지워진 하나의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은 그야말로 타락의 결과이고 천국과는 가장 거리가 먼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비유의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의 시대나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의 시대나 노동이 천대 받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의 노동 없이는 단 하루도 존재할 수 없는 이들이 자신의 노동을 혐오하고, 누구가의 노동을 천대시하고, 노동자를 비하하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요.

 

예수께서는 이를 정면으로 전복시키는 비유를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천국에서 쫓겨난 죄의 표징처럼 인식되었던 노동. 그리고 노동하는 사람(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실상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겠지요.)을 ‘천국 그 자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천국으로 지칭된 우리 모두는 좋은 땅에 좋은 씨를 뿌려야겠지요? 그 일을 고민하며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을 바라보고, 내 손에 들려있는 씨앗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천국잔치는 시작될 것입니다. ‘천국’과 같은 당신이 만들어 나갈 하나님 나라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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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여, 여래가 모두 알고 모두 보거니와 이 모든 중생이 이와 같은 가없는 복덕福德을 얻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이 모든 중생에 다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고 법상法相도 없고 법 아닌 상도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모든 중생이 만약에 마음으로 상相을 잡으면 곧 나와 남과 중생과 목숨에 붙잡힌 것이요, 법상法相을 잡으면 곧 나와 남과 중생과 목숨에 붙잡힌 것이기 때문이니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에 법 아닌 상을 잡아도 곧 나와 남과 중생과 목숨에 붙잡힌 것이기 때문이다.

 

須菩提여 如來가 悉知悉見하거니와 是諸衆生이 得如是無量福德이니라. 何以故오, 是諸衆生에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하고 無法相이며 亦無非法相이니라. 何以故오, 是諸衆生이 若心取相하면 卽爲着我人衆生壽者요 若取法相이라도 卽着俄人衆生壽者니 何以故오, 若取非法相이라도 卽着我人衆生壽者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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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믿음(淨信)이란 말은 아무 것도 없는 믿음이란 말이다. 믿음만 있고 아무 것도 없다. 믿는 나도 없고 믿는 대상도 없고 믿는 일도 또한 없다. 그러니 그 믿음에 붙잡히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이미 헤아릴 수 없는 복덕福德을 누리고 있다.

잡으면(取) 잡힌다(着). 잡는 대상이 무엇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생각은 있으나 깨닫지 못함(有念無覺)은 법인의 경계요 생각이 있어서 깨달음(有念有覺)은 현인의 경계요 생각 없이 깨달음(無念有覺)은 성인의 경계다. 지혜로운 사람이 문득 깨달아도 그것을 말로 하려니 말로 하기가 어렵구나.”(逍遙翁)​

이런 까닭에 마땅히 법을 잡기 말고 법 아닌 것도 잡지 말아야 한다. 이런 뜻에서 여래가 늘 말하기를, 그대들 비구는 나의 설법이 뗏목과 같은 것임을 알라고 하였으니 법을 버려야 할진대 하물며 법 아닌 것이야 어떠하겠느냐?

 

是故로 不應取法이요, 不應取非法이라. 以是義故로 如來가 常說하기를 汝等比丘는 知我說法이 如등筏喩者이라 하였느니 法을 尙應捨어든 何況非法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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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도道다, 라고 말하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그거니 그것을 붙잡아서는 안 된다. 이것도 도 아니고 저것도 도 아니고... 그래서 모두가 도 아니면, 그러면 도 아닌 무엇(非道)이 있으려니 하는데 그런 것도 실은 없다.

세상에는 도인 것도 없고 도 아닌 것도 없다. 그러니 이것도 저것도 잡아서는 안 된다.

뗏목이란 강을 건널 때 사용하는 도구다. 그러나 일단 강을 건너면 뗏목을 그 자리에 두고 떠난다. 선생이란 내가 그에게서 무엇을 배우는 사람이다. 배울 것 다 배웠으면 떠나야 한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는 제자가 스스로 배울 것을 다 배웠는지 잘 모르니까 선생이 알아서 떠나보내는 일이 있다. 때가 되었는데도 제자를 떠나보내지 않거나 스스로 선생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면 그는 선생이 아니다.

부처님은 황금같이 소중한 당신 가르침을 뗏목이라고 하신다. 대단한 말씀이 아니라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아무개, 이쯤에서 슬쩍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구나. 뗏목은 그것을 타고 강을 다 건넌 사람에게만 ‘마땅히 버려야 하는(尙應捨)’ 물건이다. 한참 깊은 물을 건너고 있는 놈이 다 건넌 줄 알고 뗏목을 버린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러니 뗏목 같은 부처님 말씀을 버릴 걱정일랑 놓을 일이다. 때가 되면 누가 버리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버려진다. 네 이놈! 지금은 네 놈이 더욱 그 말씀에 단단히 매달려야 할 때인 줄을 모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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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로 유학 갔던 어떤 부자 집 아가씨가 유학 중에 만난 청년을 결혼할 사람이라며 부모님께 인사 시키려고 집으로 데리고 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가씨의 부친과 청년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 장래 계획은 뭔가?” 청년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저는 신학자가 되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조용하게 말했다. “좋지, 존경 받고, 하지만 내 딸을 좋은 환경에서 살도록 할 수 있겠나?” 청년은 밝게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부친이 물었다. “그러면 당장 결혼 반지는 어떻게 마련할 건가?” 청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연구에 온 힘을 바치다 보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부자는 점잖게 물었다. “그러면 애들은 어떻게 먹여 살릴 건가?” 청년은 가슴을 펴며 말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청년이 돌아간 뒤 아가씨의 엄마가 자기 남편에게 물었다. “그 청년 어떤 것 같아요?” 그러자 남편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직업도 없고, 계획도 없어. 한 가지 알아낸 것이 있다면.... 저 놈이 나를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는 거야.”

 

성경에는 종종 믿음이 크다고 칭찬을 받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믿음이 크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단지 뜨거운 신앙 열정을 보인다거나 신앙적 활동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눅 10:39-42). 종교적 열심과 분주함이 신앙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그 안에 생명이 있느냐로 판단됩니다. 천국은 생명을 담은 겨자씨 하나에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큰 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으로 우리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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