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9.11.09 22:48

2019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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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감사'의 달]

2019년도 끝자락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결실을 맺었는지 결산을 해야 합니다. 돌아 보면 기쁘고 즐겁기보다는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이 더 많았던 한 해인 것 같지만 또 한편 모든 순간마다 우리를 이끄신 하나님의 은혜를 느낍니다. 어려운 중에도 감사의 조건을 찾고 기뻐하는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 알립니다!

1. 오늘은 왕국절 제12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22주일입니다.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기도하고 실천하며 삽시다.

2. 오늘 공동식사 후 월동준비(김장)을 합니다. 배추를 제공해주신 방인웅 장로님 김영순 권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3. 다음주일 오후에는 성서대학 후 남기평 목사님 이사 심방을 하겠습니다.

4. 목요일(14일)은 윤재민 학생이 수학능력시험에 응시하는 날입니다. 최선을 다해 시험에 임할 수 있도록 응원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5. 12월 8일(주일)에 작은교회 연합 행사 '지저스 페스티벌'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각 교회에서 '이 시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주제로 5분 '말씀 필리버스터'를 하실 분을 2명 정해야 합니다. 예배영성위원회가 논의하여 추천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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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저모

농촌생태활동을 잘 하고 왔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인 지난주일 오후에 강화도 이필완 목사님 댁으로 농촌생태활동을 갔습니다. 이번에는 환절기라 그런지 유독 몸이 아픈 분들이 많아서 아홉 명밖에(? 아홉 명이나!) 참가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상포진에 걸려서 참석이 어렵겠다고 하신 함옥분 장로님도 막상 출발시간이 되니 '그냥 앉아 있더라고 가고 싶다'고 하셔 함께하셨습니다. 역시 장로님은 함께하시는 것만으로도 큰 격려와 도움이 되는데도 열심히 일까지 해주셨습니다.

공동식사를 한 후에 출발한데다 해가 짧아져서 실제 일할 시간이 길지 않아 걱정을 하였지만 다행히 이 목사님이 요청하신 고추대와 토마토대 뽑기, 양파와 마늘 심기, 땔감용 솔가지 정리와 운반 등의 일들을 다 해냈습니다. 김미영 사모님이 새참으로 부침개를 해주셔서 맛나게 잘 먹었습니다. 

해가 떨어져 어스름해질 무렵 일을 다 마치고 저녁으로 준비해온 소고기, 돼지고기를 숯불에 구워 먹었습니다. 사모님이 내주신 반찬도 푸짐했고요. 올해는 11월인데도 많이 춥지 않아서, 남자들은 야외에서 숯불을 피워놓고 옹기종기 둘러 앉아 고기를 구워 먹었는데 맛과 재미가 아주 쏠쏠했습니다. 올해도 농촌생태활동을 통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덤으로 즐거운 시간까지 잘 보내고 돌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목회서신

 고난받는 이웃과 함께하기,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470번 버스는 상암동에서 출발하여 서대문, 남산 1호 터널, 강남역을 거쳐 내곡동까지 가는 긴 노선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470번 버스를 두 번 탔습니다. 

제가 일하는 함께나누는세상이 연 1억 원 가량을 지출하며 청소년 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용하는데 삼성경제연구소의 사회공헌연구소(삼성사회봉사단)에서 그 비용을 대고 있습니다. 함께나누는세상은 벌써 7년째 삼성경제연구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삼성으로부터 이렇게 오래 지원받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내년에도 지원을 받기 위해 담당자를 만나러 서대문 사무실 앞에서 470번 버스를 타고 가다 강남역에서 내려 강남역 8번 출구 앞에 있는 삼성 본사에 갔습니다. 은빛 유리로 뒤덮힌 거대한 성 같은 몇 개의 건물이 그 일대에서 남다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강남역 8번 출구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주 목요일에는 삼성에서 부당하게 해고된 김용희 노동자, 이재용 노동자와 연대하는 기도회가 강남역 8번 출구 앞에서 열렸습니다. 우리교회도 이름을 올리고 분담금까지 냈는데, 저는 그날 기도회에 가지 못하였습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담당자가 요구한 방대한 사업보고서와 계획서를 급하게 작성해야 해서 결국 기도회 장소로 가는 470번 버스를 타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곳에 가기 위해 두 번째로 잠깐 470번을 탔을 뿐 정작 기도회에는 가지 못한 것입니다.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삼성에 돈을 요청하러 강남역 8번 출구에 갔지만 정작 삼성 때문에 고난 받는 이웃의 손을 잡아주기 위해 그 자리에는 가지 못하였습니다. 삼성은 노동자들에게는 이런 폭력적 행패를 부리고 있지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꽤 잘 씁니다. 그 돈을 거절하는 것이 맞는지, 그런 돈이라도 받아서 좋은 일에 써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보다 먼저 드는 것은 고난 받는 이웃과 함께하기를 실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회에 못 간 것이 이내 마음에 걸리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싶습니다. 속절없이 그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하는 생각만 잠시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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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비 5조 원 요구하는 미국의 요구는 부당합니다.

 

미국 트럼프 정부는 한국에 주한미군의 주둔으로 인한 비용 부담이 터무니 없다고 주장하며 방위비 인상을 줄기차게 요구해왔습니다. 작년의 협상에서 미국은 돌연 5년이던 협정 유효기간을 1년으로 줄일 것을 요구하였고 한국은 1조389억 원을 지불하였습니다. 내년을 위해 열린 방위비 분담금 협정(SMA)에서 미국은 올해의 5배가 넘는 50억 달러를 요구했습니다. 최근 방한한 미국의 스틸웰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한국) 전쟁 후 미국은 공여국이었고 한국은 스스로 나라를 재건하면서 명백히 미국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 뒤 "이제 한국은 지역 발전의 강력한 기여국이며 훌륭한 파트너"라고 밝혀 방위비를 더 부담할 능력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도움을 준 것을 강조하지만 전쟁당사국이나 전범국도 아닌 한반도를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강제분할한 야합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한반도 분단의 책임을 외면한 터무니 없는 방위비 증액 요구는 즉각 철회되어야 합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세계 최강국 미국이 동맹이라는 한국에게 방위비를 빌미로 거액을 요구하는 강도같은 행각을 벌이고 있습니다.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를 분단시킨 책임을 망각하고, 힘의 논리로 여러 나라들에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하며 약소국 위에 군림하는 미국을 심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십니다. 

 

 

아이의 크기

 

 1

 

아이의 크기를 잴 수 있을까? 

벽에는 아이가 자란 흔적이 있습니다. 2010년 8월 15일, 142.5cm를 시작으로 틈틈이 거실벽에 가로 실선으로 아이가 자라고 있습니다. 아이도 꽤나 관심이 있었는지, 2012년 6월 10일엔 제 손글씨로 157.5cm라 적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은 더디게 자란 아이는 2013년 1월 3일에는 161.2cm, 그리고 보다 촘촘한 실선은 2014년으로 멈추었습니다. 162.1cm입니다. 그리고 아이는 키보다는 몸무게에 관심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 키재기의 재미는 조금 달라집니다. 매 학년, 5번인 친구들은 7번이 하고 싶어 깨금발을 세우기도 했으니까요. 담임 선생님의 자가 머리 위를 지날 땐 나름 긴장도 했습니다. 선생님 손에 들린 자가 제 머리 위에 서기라도 하면 묻지도 않았는데 그의 눈을 보며 울먹였습니다. “저 키 컸어요.”

아이의 크기가 길이와 무게일 때는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미가 한 짓궂은 친구의 질문으로 무너지기도 합니다. “너 아이큐 몇이니?” 그리곤 다시 돌아오는 대답은 내 것은 아닙니다. “너 두 자릿수지.” 그 친했던 친구, 계란을 풀어 라면도 끓여준 종필이도 웃고, 한 번쯤 고무줄 끊는 개구진 친구를 막아주었던 지영이도 웃었습니다. 세상 서운한, 나라가 망한 날이었습니다.

 

I.Q., ‘Intelligence Quotient’, ‘지능 지수’의 약자입니다. 한때 학교는 지능 지수로 아이의 크기를 가늠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성적과 지능 지수를 비례 관계로 생각될 때이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이 지능 지수라는 것으로 아이 미래를 포함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을까는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럼에도, 150이 넘는다 하여 동네 천재 났다 신문에 오르내릴 때 불편함이란. 그래 그때 150이 넘던 친구들의 오늘인 그들의 미래를 다시금 궁금해하는 것을 보면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는 아이의 크기 재기임은 분명합니다.

 

아이의 크기 재기였습니다.

 

 2

 

오늘 아이의 크기 재기는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 지능 지수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조금 다양해졌습니다. 그리고 다중지능이론입니다.

다중지능이론Theory of Multiple Intelligence. 아이의 지적이 능력에 대해 다양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시각입니다. 아이의 다양한 능력을 바로 평가하고 계발하려는 노력은 1970년대 말부터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었습니다. 

 

1. 언어지능Linguistic Intelligence, 말이나 글을 통하여 언어를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 2. 논리수학지능Logical-mathematical Intelligence, 논리적·수학적으로 사고하는 능력, 3. 음악지능Musical Intelligence, 음악뿐만 아니라 소리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능력, 4. 신체운동지능Bodily-kinesthetic Intelligence, 신체적 운동을 통제하는 능력, 5. 공간지능Spatial Intelligence, 공간·시각적인 것에 대해 파악 및 반응하는 능력, 6. 인간친화지능Interpersonal Intelligence, 타인과 교류하고 감정과 행동을 파악하는 능력, 7. 자기성찰지능Intrapersonal Intelligence, 자신의 상태나 감정을 파악하는 능력, 8. 자연친화지능Naturalist Intelligence,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지능, 9. 실존적 지능Existential Intelligence, 인간 존재의 이유, 삶과 죽음의 문제, 희로애락, 인간의 본성 등 철학적이고 실존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으로 구분합니다.

 

지리한 노력만큼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한 가지 능력을 바탕으로 아이의 크기를 재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지능의 한 부분이 아니라 다양한 부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이에 따라 지능의 범위를 넓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능 지수 하나로 잴 수 없는 아이의 크기를 여러 방법으로 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아이가 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크기를 재는 범위가 넓어졌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하나 아닌 다른 방법을 제안해 주었습니다.

 

아이의 크기 재기입니다.

 

 3

 

우리가 우주나 은하계, 별 또는 이 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묻는 대신에 좀 더 세부적인 질문부터 시작해보자. 우리는 한 알갱이의 소금에 대해 얼마나 상세하게 알 수 있을까? 시력이 아주 좋은 사람이 현미경 없이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가진 1마이크로그램의 소금을 한번 생각해보자. 이 소금 알갱이 안에는 대략 106개 정도의 나트륨과 염소원자가 들어있다. 이는 1아래에 0이 16개 있는 10억의 천만 배에 해당하는 수만큼의 원자가 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 Carl Sagan, Broca’s brain: The Romance of Science, London. Hodder & Stoughton, 1979. 존 캐리, 『지식의 원전』, 이광렬 외 역 (바다출판사, 2005), 687쪽, 재인용.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1996). 미국 코넬 대학의 천문학 및 우주과학 교수였습니다. 그는 『브로카의 뇌』에서 우주와 소금이라는 대비되는 크기로 앎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우주만큼 소금 역시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주나 소금이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연과학적 원리를 가지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많은 것 하나하나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리가 필요하다는 것이지 원리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존재하는 것은 원리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아무도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이 남아 있지만, 동시에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는 이 세계를 나는 좋아한다. 모든 것이 알려진 세계란 정적이고 활기 없는, 심약한 신학자들이 지어낸 천국만큼이나 지루한 곳일 것이다. 

- Carl sagan, 존 캐리, 691쪽, 재인용.

 

아이의 크기는 어떻게 잴까? 사람들은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다양한 부분들을 발견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이에게서 발견한 많은 부분이 생겨나면서 아이의 크기는 오히려 작아지는 느낌입니다. 그냥 몇몇 원리로 설명 가능한 아이일 뿐입니다.

우주가 클까? 소금이 클까? 아이의 크기를 알 수 없다는 것에서 찾기를 제안합니다. 아이의 크기는 우리가 알아낸 많은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잴 수 없는 어떤 것은 아닐까? 그만의 신비에 있지는 않을까?

 

“사물의 이름을 말해 버리는 것은 시가 주는 즐거움을 앗아가는 것이 된다.”

 

말라르메(Stephane Mallarmé, 1842~1898,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에게서 읽은 아이의 신비입니다. 아이의 크기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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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여. 이른바 부처님의 법이라는 것이 부처의 법이 아니다.

 

須菩提여. 所謂佛法者가 卽非佛法이니라.

 

---------------------------------------

 

불법佛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그게 불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모든 문자와 글귀가 표지標識나 손가락과 같다는 말씀이다. 표지나 손가락은 곧 그림자나 메아리를 뜻한다. 표지를 의지해서 사물을 취하고 손가락을 의지해서 달을 보는데 달은 손가락이 아니요 표지는 물건이 아니다. 다만 경經을 의지하여 법法을 취하거니와 경은 법이 아니니, 경문經文은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법은 혜안慧眼으로만 볼 수 있다. 혜안을 뜨지 못한 자는 경만 보고 법은 보지 못한다. 법을 보지 못하면 부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끝내 부처님의 도道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六祖)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성 바울로)

옳으신 말씀이다. 그러나 ‘문자’가 없다면 우리가 그 ‘옳으신 말씀’을 어찌 들을 수 있겠는가?

 

9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아뢰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 그런가 하면 수다원을 일컬어 성스런 흐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만 들어간 바가 없으니 모양, 소리, 냄새, 맛, 느낌, 생각에 들어가지 않는데 이를 이름하여 수다원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須菩提여 於意云何오. 須陀洹이 能作是念하되 我得須陀洹果不아. 須菩提言하기를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何以故오. 須陀洹을 名爲入流나 而無所入이니 不入色聲香味觸法인데 是名須陀洹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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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원須陀洹은 산스크리트어 쇼타파나shotapana의 음역.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과 함께 이른바 네 나한(四羅漢)을 이룬다.

“수다원이란 범어梵語요 唐言으로는 逆流라 하니 생사의 흐름을 거슬러 세상의 때에 더럽혀지지 않고 한결같이 무루업無漏業(번뇌에 젖지 않는 업)을 닦아 거칠고 무거운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여 다시는 지옥, 아귀, 축생 따위의 몸을 받지 않게 되니 이를 일컬어 수다원이라고 한다.”(六祖)

‘입류入流’란 성스런 흐름(聖流)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한 방울 물이 바다로 이어지는 ‘흐름’에 들어가면 이제 그가 ‘바다’로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모든 개울이 강에 이어지고 강은 또한 바다에 이어진다. 그러므로 개울과 바다는 둘이 아니다(不二). 이 점을 놓치고 보니, 보살도 못 된 것이 부처 행세를 하고 다니는 꼴불견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거룩한 흐름에 들어간 자는 “내가 마침내 입류를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에게 그런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그가 흐름에 들지 못했다는 증거일 뿐이다.

부처로 되는 길에 들어섰다는 말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모두 여의었다는 말이다. ‘나’라고 하는 상을 이미 떠났는데 그 있지도 않은 ‘나’가 무슨 열매(果)를 맺었다는 말인가? 그러나 열매를 맺은 ‘나’는 없지만 열매는 있다.

흐르는 물 속에서 물방울은 사라졌지만 그러나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물은 아직 흐르고 있다. 바다까지 가려면 오히려 길은 멀다. 그러나 그 길을 가는 것은, 거듭 말하거니와, 시간 문제다. ‘시간 문제’라는 말은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는 뜻이다.

거룩한 흐름에 들어갔다는 말은 더 이상 모양, 소리, 냄새, 맛, 느낌, 생각 따위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도 물론 모양을 부고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거기에 집착하지 않기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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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회 여 집사가 병원 종합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암 진단을 받았다. 앞으로 6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절망이 되었지만 곧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빌려 쓰고 이런 저런 이유로 갚지 못했던 돈도 갚고 사람들을 만나 맺혔던 관계도 다 풀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의 대부분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하고 자신이 아끼던 물건도 나눠주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는데도 몸은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다. 다른 병원에 갔더니 오진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너무나 기뻐하고 축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운 마음에 물었다. “집사님, 돈도 많이 쓰고 옷도 다 나눠 줘 버렸는데 후회 되지 않으세요?” 

여 집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지난 6개월처럼 진지하게 내 인생을 살아간 때가 없었습니다. 이 마음으로 나머지 제 인생도 살았으면 좋겠어요.”

 

오늘도 죽음은 문 밖에서 집을 지키는 개처럼 움쿠리고 있습니다.  말로는 영생을 원한다고 하면서 정작 죽음이 찾아오면 기겁을 하고 두려워 떠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좁은 길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넓은 길을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말은 예수처럼 살자고 하지만 생각은 어떻게 그렇게 고리타분하게 사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사망선고를 받고 나면 자신이 살았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을 지탱했던 아집과 자존심, 밑 모르는 탐욕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하고 부끄러운 것이었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영생은 죽음의 문을 지나야 합니다. 영생의 길에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중요한 지를 살피며 살아야겠습니다. 

[페이스북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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