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이름으로 혐오하지 말라] 14장 혐오 내려놓기 (3)

by 좋은만남 posted Dec 2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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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혐오 내려놓기 (3)


(이어서) 과거에 대한 복수는 치유 대신 과거를 영속화한다. 히브리성서에서 하나님이 복수해 주기를 기도하는 말씀은 흔히 오해받는다. 왜 사랑, 용서, 미래에 헌신하는 종교가 복수를 위해 기도하는가? 크로아티아 출신으로 과거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참혹한 민족전쟁을 목격한 예일대 신학교수 미로슬라브 볼프는 인간의 잘못에 하나님이 복수하실 것이라는 믿음은 인간이 그렇게 복수하지 않아도 되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신명기 32:35, 로마서 12:19) 과거는 되돌릴 수도, 고칠 수도 없다. 역사에는 완전한 정의란 없고 대략적 근사치만 있다. 그것은 반드시 행해야 하지만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오경은 원한을 품지 말라고 강조함으로써, 그 잘못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지워지고 더 이상 기억되지 않도록 하여 문명 생활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믿음의 당연한 결과다. 서로 다른 문명은 서로 다른 성격 유형을 만들어 낸다. 인간은 환경과 우리가 어린 시절에 배운 마음의 습관으로부터 내면화한 마음의 구조에 크게 달려 있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믿는 것은 우리 자신에 관해 믿는 것에 영향을 끼친다. 
유일신론은 갈등을 내면화하지만, 신화는 갈등을 외부화한다. 신화에서 서로 충돌하는 신들은 유일신론에서는 한 분 하나님의 마음속 내적 충돌이 되는 것처럼, 인간의 드라마는 전쟁터가 아니라 정신, 영혼 속에서 벌어진다.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게 되자마자, 그는 더 이상 형 에서와 씨름할 필요가 없어진다. 히브리성서와 유대교 전체는 내면의 투쟁 이야기이며 ‘다른 누구의 잘못’이었다는 심리적 대안을 배제한다. 이것이 바로 유일신론과 이원론 사이의 차이다. 
재앙을 당하면 이원론자는 ‘누가 나에게?’라고 묻지만, 유일신론자는 ‘이제 나는 무엇을?’이라고 묻는다. 비난의 문화와 참회의 문화, 두 가지 존재 양식이 있다. 비난의 문화는 외부에 초점을 맞추고 과거를 돌아보며 수동적으로 만든다. 책임의 논리 위에 세워진 참회의 문화는 내면의 응답에 집중하고 미래를 보며 능동적이고 근원적인 존엄성을 잉태한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예언자적 목소리이다. 재앙을 맞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남을 비난하지 않는다. 이것이 유대교를 죄의식의 종교, 회개와 속죄의 종교로 만든 것이며,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 견딜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참회가 에너지를 보존하는 것은 모든 고난을, 미래에 더 나은 것을 하기 위한 추진력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속죄가 자유의 궁극적 표현인 이유는 참회와 용서를 통해, 과거라는 족쇄를 깨드리기 때문이다. 용서는 악의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는 표현이고 속죄는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가 만나 새로운 시작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그들 때문’이라는 이원론은 비난의 문화를 창조한다. 이타주의적인 악은 자신과 국가, 민족을 다른 누군가의 범죄의 피해자로 보게 하여 양심의 가책 없이 그들을 죽일 수 있고 살인은 도덕적 행동이 되며 오히려 하나님의 승리를 돕는 행위로 만든다. 이것은 자기파멸적이다. 자신을 희생자로 정의하는 것은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 객체로 만들어 인간성을 축소시킨다. 비난의 문화는 가난이나 질병 등 실제 고통을 허구적인 원인, 남 탓을 하면서 그들이 저항하는 모든 조건을 영속화한다. 
이원론은 폭군들이 사람들을 수단으로 조작하기 위해 만든 문화적 현상이다. 사람들을 혐오하도록 교육할 수 있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하도록 만들 수 있다. 아랍의 봄을 통해 몇 차례 폭동으로 맞섰던 세속적 민족주의적 정권들이 이스라엘 국가에 초점을 맞춘 반유대주의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는 한편 세속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정권에 반대하여 형성된 이슬람주의 운동 역시 악랄한 반유대주의를 사용하며 자신들이 저항하는 부패와 잔인성, 불경기를 영속화한다.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는 것은 도덕적 삶의 사치가 아니라, 필수적이다. 먼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 과거를 구원하는 방법이다. 혐오는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혐오를 내려놓아야 한다. 어둠의 자식들과 전쟁을 벌이는 대신 당신과 당신의 자녀들이 확실한 빛의 원천이 되도록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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