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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기독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의 자리 : ‘실패’는 끝이다



‘실패’는 끝이다


‘실패’는 다시금 도전할 공간을 선물한다. ‘실패’는 ‘정-반-합’의 ‘합’으로 가는 길목일 수 있다. 실패를 벗어나 반전을 만드는 과정은 괴롭지만 받아들여야 하고, 그만큼의 노력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실패를 긍정적으로 볼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공동체가 실패를 능동적으로 돌파할 힘 이 있다면 실패는 자양분이 되고 다시 한번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된 다. 그러나 실패할 ‘기회’조차 없다면, 실패가 끝이라면, 그 공동체는 절망적이다. 2022년의 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의 자리는 실패를 더 이상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없고, 그럴 여유조차 없다. 


무엇보다 뼈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사람’에 대한 실패이다. 사람의 실패는 현재의 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공동체의 생사를 좌우할 중요 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과거처럼 많은 청년들이 공동체에 존재한다면 여러 가능성을 놓고 조직의 미래를 판가름할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 지 못하다. ‘사람-선택권’이 없는 공동체는 생존을 선택한다. ‘사람’을 세 우는 문제는 바로 공동체의 생사로 연결된다. 사람-실패는 곧 끝이다. 청년이 사라진 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은 종료 버튼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그렇다고 종료 버튼조차 스스로 누르지 못한다.


기회가 많았던 과거에는 청년들이 몰렸다. 그러니 콘텐츠가 넘쳐났고, 역동적이고 진취적이었다. 그 기회를 잡은 이들은 개인적 영광까지 이 루기도 했다. 많은 시련과 탄압이 있었지만 그만큼 큰 성과를 이룬 여러 ‘홍길동’이 있었고, 그들을 존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걸출한 인물들이 올라간 그 많던 상승 사다리는 지금 없다. 그 사다리는 그 시대와 요구 가 만들어낸 사다리임은 분명하다.


물론 그들이 사다리를 걷어찬 것은 아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자연스럽게 국격이 격상되고, 각종 시민단체가 등장하고 세분화되었으며, 각 분야의 전문화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그 사다리들은 현재 기독청년 활동가들이나 청년 에큐메니스트들이 올라갈 수 없는 사다리가 되었다.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이 1970-80년대 얻었던 소중한 기회를, 이제는 에큐메니컬 정신으로 분쟁 지역이나 민주화 운동 중인 타국가들에 양보 해야만 하는 사다리가 되었기에, 현재 기독청년 활동가들에게는 그러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라면 현재 기독청년들에게 걸맞는 사다리를 새롭게 만들어야 하고, 각 시대에 맞는 사다리를 다양한 용 도로 만들어야 했지만,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신경 쓰지 않았다. 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의 지속성과 계속성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해외 지원을 벗어나 자생하거나 자립할 수 있는 대안을 어느 누구도 고민하지 않았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본의 아니게 몇몇 출세가도를 달 린 이들과 불세출의 몇몇 인물들이 사다리를 걷어찬 꼴이 되었다. 적어 도 그다음 사다리를 만들 책임은 도의적으로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후폭풍은 거셌고 결국 사람은 사라졌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찬연한 세대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창연한 세대가 되었다.


실패할 ‘기회’조차 없는 공동체에 희망이 있는가? 현재 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실패는 곧 좌절이라는 등식이 성립된 지 오래이다. 코로나 19 팬데믹 이후 대면 모임은 위축되었고, 더 이상 기존의 방식으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현장에서 대부분 체감하고 있다. 변화하는 시대의 벽 앞에서 ‘실패’할 기회조차 없다면, 어떤 선택지가 남을까? 곧바로 냉소 와 허무가 밀려온다. 그러니 구성원들은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상책이라고 느낀다. 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에 헌신한 이후, 인생의 청사진 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기독청년 활동가들이 자리를 떠나는 것은 좌절을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상실감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떠난 이들을 다시 붙잡을 수는 없다. 희생을 강요하기에는 최저시급에도 한참 못 미치는 처우를 감당해야 하는 녹록지 않은 현실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상실을 채우거나 만회할 수 있는 반전의 순간조차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 전체를 바라볼 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실패는 곧 공동체의 ‘리셋’을 누르게 하지만, 그마저도 사람이 있을 때나 가능 한 소리이다. 생존 투쟁을 하는 이들에게 실패는 곧 끝이다. 이런 상황 까지 왔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 희망이 없다는 반증이며, 이제는 회생 가능성을 물어야 한다. 계속 버틸 재간이 있는지 솔직하게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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