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루와 2루 사이에서
카를 융은 말했다. “아픔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아픔에서 벗어나면, 그와 함께 그대 자신한테서도 벗어난다.” 이 진실을 그리스도교 방식으로 말하면, 십자가다. 아픔은 통로다. 우리는 우리의 억지를, 우리의 거짓을, 직면해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에니어그램의 아홉 가지 거짓 이미지들 가운데 하나인 가짜 하느님 이미지가 있다.
믿음은, 내게 있어서, 그 이미지들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으로 느껴지리라. 신앙은 참으로 어렵고 드물다. 그리고 종교는 참으로 쉽고 흔하다. 아무도 1루와 2루 사이에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은 당신이 과연 2루로 갈 것인지가 확실치 않은 1루와 2루 사이-공간에 있다. 당신은 1루를 떠났지만 아직 2루에 닿지 못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1루의 안전함을 선택한다.
하지만 신앙은 사이-공간, 문지방에서 생겨난다. 내가 나를 통제하던 곳, 내가 나를 증명하던 곳, 내 에고의 울타리가 건재하던 곳, 나 스스로 옳고 우월하다고 생각하던 그곳을 떠날 때 신앙은 생겨난다.
우리 모두 자기를 정당화하려는 함정에 빠져든다. 하지만 자수성가(自手成家) 시도를 그만두는 곳, 더 이상 자기 의로움을 스스로 증명코자 하지 않는 곳에 신앙으로 인정받는 의로움이 있다. 당신은 그것이 어떤 굴복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는가? 오직 하느님만이 당신을 그 길로 인도하실 수 있다. 흔히 커다란 상실이나 비참한 궁지에 몰릴 때 그런 일이 발생한다. 우리는 아픔이 우리한테 던지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때 아픔을 관통하여 우리는 진실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