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복] 둘째 길 어둠을 벗삼기, 떨쳐버림과 받아들임 : 비아 네가티바 VIA NEGATIVA (부정의 길) [마당 12] 비워짐 : 고통을 받아들임 : 케노시스

by 좋은만남 posted Aug 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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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길  어둠을 벗삼기, 떨쳐버림과 받아들임 : 비아 네가티바 VIA NEGATIVA (부정의 길)

[마당 12] 비워짐 : 고통을 받아들임 : 케노시스


그리스도께서 고통 중에 계실 때 우리도 고통 중에 있었다. 고통을 겪을 수 있는 하느님 창조계의 만물이 그분과 함께 고통을 겪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던 그때, 그분도 자연의 일부이시므로 하늘과 땅이 힘을 잃었다.      -노리치의 줄리안 

비움은 중요하고 비워짐은 더욱 깊이 중요하다. 우리가 허락하면 고통이 우리를 비운다. 고통이 도처에 현실로 존재하기에 그 속에 들어가 기도할 수 있도록 인정할 필요가 있다. 약물이나 술, 멜로드라마나 쇼핑으로 고통에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착된 형태로 동조하며 우리 삶을 이끌어 가게 한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어둠에 직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용기와 큰마음이 영성여행의 필수적인 덕이다. 그러므로 그 안에 들어가 벗이 될 필요가 있다. 예수도 같은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충분히 오래 고통을 먼저 끌어안고 사랑하지 않고는 떨쳐버릴 길이 없다. 에로스는 대가 없이 얻을 수 없다. 끌어안음이,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임이 먼저다.
고통은 고통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고통을 당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잊지 않기에 사회적이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강한 체험은 늘상 자비를 인식하고 익혀 성장하게 한다. 또 고통은 우리가 기쁨을 이해하고 비판하도록 도와준다. 고통은 우리를 더 깊은 사람으로 다듬어 나가고 기쁨도 고통도 모두 은폐한 덮개들을 제거해 줄 뿐 아니라, 삶에서 참된 기쁨과 더없이 단순하고 쉽게 공유되는 형태임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또 엘리트의 기쁨이라는 기만적 환상들을 깨뜨리고 내부의 아름다움을 감지하게 한다. 비아 네가티바가 실제로 삶의 바탕에 놓인 기쁨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키울 수 있는가를 표현하는 심리학 용어는 탈자동화(deautomatization)이다. 어른들은 으레 둘레에 있는 아름다운 것에 자동적으로 반응한다. 기쁨, 삶의 귀중함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있다. 우리가 회피하지 않으면 전혀 원하지 않았던 고통이 때때로 삶에 대한 사랑을 되돌려 준다. 
고통을 타고 가는 여행으로 우리는 강인해진다. 고통은 우리를 시험하며 우리가 몰랐고 못 했던 훈련을 요청함으로써 우리를 더 강하게 한다. 고통을 감지하는 데에는 새로운 힘, 인내와 끈기의 힘, 고독의 힘이 필요하다. 고통이 에로스를 연료로 삼아 삶을 아름답게 한다. 아름다움도 어렵다. 그러나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것을 담을 만한 그릇이 될 만큼 강하게 만들어 준다. 
또 고통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맺어준다. 모든 사회적 운동과 조직은 실업, 부당한 세금, 인종·성·연령 차별과 같은 쓴 체험인 고통에서, 함께 나누는 고통에서 태어난다. 어두운 여행을 함께할 동반자를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깊이 혼자가 되어 고통 속에서 비워질 때 사회적 연계를 가능하게 하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활기찬 힘이 된다. 해방은 고통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거기서 고통을 나눌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곳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고통은 우리를 열어놓게 한다. 우리의 고통은 우주적 고통이므로 우주 자체와 동일화해야 한다. 우주 만물이 고통을 겪고 있고 이 고통은 우리를 결합시킨다. 우리의 고통을 인간이 만든 에고 세계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런 접근은 약물이나 술, 계속 울어대는 것에 집착하게 할 뿐이다. 우주적 그리스도가 우주적 고통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을 제시한다. 우주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반응하였고 인간 우월주의를 깨뜨려 만물을 하나로 결합시켰다. 
고통은 타락/속량 전통에서 지나치게 강조하듯이 그렇게 우리 죄에 대해 지불해야 할 대가가 아니다. 고통은 우주가 인간이라는 자녀를 낳는 최근의 산고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모든 출산과 연관돼 있다. 출산으로 이어지는 고통은 축복일 수 있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고통을 떨쳐버리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