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복] 넷째 길 새 창조계를 벗 삼기 : 자비, 경축, 에로스적 정의 비아 트란스포르마티바 VIA TRANSFORMATIVA (변모의 길) [마당 22] 성령의 예언자적 부름을 신뢰함인 믿음

by 좋은만남 posted Nov 2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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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길  새 창조계를 벗 삼기 : 자비, 경축, 에로스적 정의 비아 트란스포르마티바 VIA TRANSFORMATIVA (변모의 길)

[마당 22] 성령의 예언자적 부름을 신뢰함인 믿음

인간 영혼에 관심 있노라고 고백하면서 영혼을 흠낼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에는 관심 없는 종교는 영적 빈사 상태에서 묻힐 날이나 기다리는 종교다.   - 마틴 루터 킹

타락/속량 전통에서는 '예언자'가 허리만 두르고 광야에 살며 세상에 독설과 저주를 퍼부은 별난 외톨이 세례자 요한으로만 보인다. 그리스도교 영성운동의 탄생은 인간의 분열과 적대를 척결하는 성령의 힘에 대한 오순절 체험으로 시작되었다. 이 체험으로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아모스 같은 역사상 위대한 예언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예언자로 부름받았다. 보통 사람들이 모두 예언자 소명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는 것은 문명의 역사에서 작은 일이 아니다. 인간적 이해력이 아니라 모든 인류 위에 쏟아지는 성령의 은총에 바탕을 둔 것으로 신뢰한다면 이것은 새 창조를 가져오는 힘이 될 수 있다. 
예언자란 다바르, 곧 하느님의 창조력 또는 말씀이 불의나 게으름이나 이미 있는 것이 절대적이라는 지나친 믿음에 의해 차단 혹은 억눌렸을 때 그것을 수행해 나가는 사람이다.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예언자는 우리의 사회적 양심, 하느님께 사랑받는 이들이 불필요하게 겪는 고통에 대해 충심으로 느끼는 관심이다. 예언자의 주요 활동은 개입이었다(헤셀). 군국주의든 교회 내 성차별이든 교육상 인종차별이든 자아와 사회의 이원론이든 현행 사태에 개입하는 것이고 예언자는 그 자리에 있다. 예언자는 새 창조계가 나타나려면 깨뜨리고 깨뜨려질 필요가 있다는 것에 민감하다. 
예언자는 분노, 도덕적 격분, 참을 수 없는 것을 신뢰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분노와 격분이 창조적 가능성 수행을 위해 필요하다. 분노는 사랑에 비례하며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가 생명력과 창조의 열쇠이다. 즉 예언자는 상상력의 직무이다. 예언자는 억눌린 사람들의 분노를 순화나 수동성이 아니라 변혁과 자기표현과 새 창조의 길로 재순환시킨다. 물론 성령이 이 재출산을 위한 위대한 변혁자이다. 바울의 세계를 종살이와 예속에서 자유와 정의로 변혁시키라는 소명은 우리 일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언은 축복의 귀환이다. 우리 안에 있는 예언자는 우리가 줄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최선의 것(첫째 길), 떨쳐버릴 수 있는 최선의 것(둘째 길), 창조할 수 있는 최선의 것(셋째 길), 과거를 변혁함으로써 미래에 출산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인 탁월함과 아름다움을 불러낸다. 그러므로 창조중심 영성 여행에 나선 운동은 필연적으로 예언에 이른다. 예언자의 히브리어 어원과 파생어는 살펴보다, 열중하다, 꿰뚫다, 비우다, 싹트다, 열매 맺다, 분출시키다, 쏟아내다는 말들과 통한다. 예언자를 단지 개인이 아니라 운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중요하다. 노인 권리 신장, 여성해방, 절주와 절식, 기초공동체 운동과 핵 거부, 동성애자 해방까지 다양한 예언자적 해방운동을 통해 성령이 부르신다. 그리고 이 소명은 때가 변하고 우리가 변하고 변하는 문화 속에서 우리 책임도 변함에 따라 때때로 과거의 예언자적 소명을 떨쳐버리고 새 소명에 잠겨 들라고 부른다. 
예언자는 감정과 이해와 사람들을 일으키기 위해 선택하는 방법에서 비엘리트주의자다. 비전문가도 이해할 수 있는 거리 영성을 제시한다. 그래서 예언자는 보편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정의와 불의의 상징을 끌어내는 예술가라야 한다. 창조중심 영성은 비엘리트주의다. 창조는 인간사를 지배하는 자들이나 전문가, 지배계층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 속한다. 여기에 '너는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이 섬김에서 '너는 무슨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가?'의 질문이 제기된다. 전문가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쓴다면 거리에 있지 않기 십상이다. 예언자는 창조계와 특히 창조계의 보잘것없는 사람들, 아나윔을 사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름다움과 존엄을 일그러뜨리는 고통의 심연을 체험하고 재창조의 일을 한다. 그 창조력은 자비와 축제와 사회 정의를 통해 치유를 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