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복] 넷째 길 새 창조계를 벗 삼기 : 자비, 경축, 에로스적 정의 비아 트란스포르마티바 VIA TRANSFORMATIVA (변모의 길) [마당 25] 자비 : 상호의존과 에로틱 정의

by 좋은만남 posted Dec 1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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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길  새 창조계를 벗 삼기 : 자비, 경축, 에로스적 정의 비아 트란스포르마티바 VIA TRANSFORMATIVA (변모의 길)

[마당 25] 자비 : 상호의존과 에로틱 정의


우리 자신이 가난하고 상처받고 고생하는 이들과 떨어진 것이 오늘날 종교생활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우리는 토론하고 이론화하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면서 우리가 사람들의 고난에 직면할 때 다가오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렸다. - 장 바니에

상호의존에 대한, 그리고 공동의 것인 우주적 자궁의 은총에 찬 국솥을 함께 나눔에 대한 첫 응답이 경축이라면, 둘째 응답은 치유다. 그릇된 의존과 그릇된 독립의 바탕은 불의이므로 정의를 이룸이 치유의 첫째이다. 자비에는 축제 거행도, 정의 구현도 자비라는 한 인격의 동일한 뿌리에서 나온다. "불의해진 자들은 대개가 기쁨을 미워하는 자였다."(오든) 에로틱 경축을 촉진하는 문명만이 정의의 새 시대를 선도할 수 있다. 남들에게 일어나는 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나에게도 일어난다. 이 때문에 자비는 정의와 연관된다. 자비의 축제 면이 우리 세계의 상호 관련에 대한 우뇌의 반응이라면, 자비의 정의 면은 좌뇌의 반응이다. 그러나 가부장제와 계몽주의가 정의를 추상적이고 너무 멀고 주관적으로 규정했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추상화된 정의를 내세우면서 강제력을 이용했고 자본주의 국가들은 소비주의를 동원했지만 어떤 이데올로기도 자체 안에 움직이는 정의를 발견하지 못했다.
여성론자들이 마르크스주의나 자본주의에나 사회 창출 노력에 예언자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에로스의 회복이다. 에로스의 결여는 땅·물·공기·식물·동물·몸과 실업자·취업자에 대한 돌봄과 친밀감의 결여이다. 여자들의 힘인 에로스가 치유를 제공하지만, 가부장 철학들은 정의에서 에로스를 제거했다. 에로틱 정의는 무엇보다 불의를 접하는 느낌이다. 불의는 추상이 아니고 사람들의 삶에서 에로스와 기쁨을 고갈시킨다. 에로스는 간접으로 느낄 수 없다. 전투기 조종사가 10킬로 상공에서 폭탄을 떨어뜨려 눈 아래 마음을 불바다로 만들었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거리 때문이다. 그 마을에서 어린이와 노인들이 불타 죽는 것을 눈으로 보고 냄새로 맡는다면 폭탄 투하를 주저하게 될 것이다. 친척이 고문당했거나 90%가 실업자인 도시의 희생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할 때, 걸인들이 늘어선 캘커타 거리를 지날 때 비로소 달라진다. 가까움이 상황을 반전시킨다. 예언자적 운동들이 오늘날 그런 값진 변혁운동을 하고 있다. 제3세계 사람들이 제1세계 사람들을 불의와 정의의 이론 형성에 초대하고 있다. 이런 것이 에로틱 교육, 에로틱 정의 교육 운동이다. 
에로스는 우리를 일깨우는 힘이 있다. 열정과 느낌, 희망과 초월성을 되살려낸다. 외로운 추방에서 되돌아오게 하는 자비를 가능케 하며 마음과 일과 생활방식의 진정한 전환, 진정한 회심을 하게 한다. 제1세계 교회 구성원이 더러 제3세계를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돌아가 그 체험의 의미를 이해하고 확산시키도록 도와야 한다. 에로틱 정의는 만물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이 만물 안에 있다는 내재신론적 신학에서 나온다. 하느님이 만물을 사랑하신다면, 창조계가 고통 중에 있을 때 하느님도 고통을 느끼시며 그 고통 중에 계신다. 그러나 서양 유신론은 차갑고 추상적인 정의를 창출했다.
정의는 불의에 깨어남이다. 정의는 열정적 관심에 의해 세워진다. 예언자의 마음에는 정의가 아니라 억압과 부패의 현실이 먼저 다가오며 정의의 절박성은 억압의 희생자를 돕고 구함의 절박성이 된다. 넉넉하고도 남게 가진 사람들이 떨쳐버림의 기술을 배울 때 억눌린 사람들은 물론 억압자 자신도 축제로 이끌린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누구나의 탐욕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간디) 간디는 정의 구현을 승패로 규정하지 않고 사람들을 변혁으로 이끌고 한동안 증오를 흡수하는 사랑으로 규정한다. 아가서에서 애인을 찾아내는 것처럼, 에로스가 우리 사회의 고통을 찾아내기를 강조함에 주목하라. 평화와 정의, 휴식과 동등, 관계의 기쁨과 관계의 바름의 에로틱 혼인이다, 이것이 자비로운 하느님의 일이다. 비록 실패할 수 있더라도 여기에 참여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경축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