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을 넘어서] 3장 희생제물 (4)

by 좋은만남 posted Apr 0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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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희생제물 (4)

◆ 떠남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로마의 진정한 백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경멸하며 파멸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희생제사 거부를 이해할 수 있는 정신적 기초이다. 고대 세계에는 장소적 형태와 유토피아적 형태의 종교가 있다고 하는데(조너선 스미스) 희생제사는 장소적 종교의 전형이다. 로마의 황제는 희생제사 전통을 발전, 보급하고 이를 통해 질서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런 세상은 노동력이 없거나 남성의 세계에서 내쳐진 이들에게는 쫓겨날 가능성이 큰 쓸모없는 세상이다. 장소 중심 종교는 전쟁, 사회적 변혁, 경제적 억압 등에 의해 정당성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유토피아적인 종교, 장소가 없는 길이다. 이 길은 흩어지고 움직이며 이동한다. 현존하는 세상으로부터의 이탈을 꿈꾸는 이런 형태는 '구원자' 종교들이다. 구원자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세상에서 패배한 사람들을 더 새롭고 좋은 장소, 궁극적인 집으로 인도한다. 그리스도교도 그중 하나였다.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은 노예, 성매매 여성, 죄인, 장애인처럼 마을, 가정, 가족으로부터 철저히 떠났던 사람들이다. 이 운동은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하는 계기를 발견했지만 실제로는 '장소가 없는' 혼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기에 가장 위험했다. 
예수의 추종자들에게 로마의 반체제 혐의로 처형된 예수의 죽음은 모든 것을 분명해지게 했다. 로마제국은 하나님의 제국을 용납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제국이 지정해준 장소들에서 떠났고 희생제사를 멈추었다. 이런 행위는 유대교 예언자 전통 속에서 자신들에게 진실을 말해줄 반(反)희생제사적 메시지를 발견하게 한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던 예수는 적대자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라는 말씀의 뜻을 배우라고 했다. 희생제사와 더불어 시작되는 청결함이 보증된 격식 있는 식사에는 죄인을 위한 자리가 없었다. 적절한 자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희생제사는 걸림돌이 되었고 결국 이들과는 무관한 것이 되었다. 이미 속죄의 의미를 담은 순교자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추종자들은 자신들을 위한 '희생제물이 된 예수'라는 은유로 확장하였다. 제단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물론 희생제물이 아니었다. 예수는 매 맞고 찔리고 찢긴, 흠 없는 양이나 처녀, 심지어는 영웅도 아니었고 지성소가 아니라 도시 성벽 바깥의 악취 나는 시쳇더미에 버려졌다. 이런 예수를 희생제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로마제국의 희생제사에 대한 역설과 통렬한 반대였다. 
히브리서는 예수의 죽음을 언약의 희생제물로 규정하며 모든 희생제물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마지막 희생제물로 본다. "그는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을 단 한 번의 희생제사로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습니다."(히브리서 10:14) 희생제사 개념을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철폐하게 한 것이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를 대체하고 넘어섰다는 주장의 핵심 근거가 된다. 히브리서는 유대교 기법을 통해 유대교 전통 그 자체 안으로부터 반희생제사적 정서를 고무시키고 있다. 제국에 대항하여 반체제적 입장에 섰던 사람들, 자신에게 배정된 자리를 거부하던 사람들이 처한 공개적 수치와 모욕, 투옥과 재산 몰수라는 공동의 운명에 이 서신은 시의적절했다. 
히브리서는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을 들며 '떠남'이라는 주제의 유대교적 대서사 전통을 결단과 믿음의 도전정신과 연관시킨다. 유대교 대서사 전통에서 믿음은 흔히 거부당함을 받아들이는 것, 쫓겨나는 것, 그리고 새로운 약속의 땅, 새로운 제단이 있는 장소를 찾아 유랑하는 것을 의미했다. 장소 없이, 자유롭게,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이런 개념은, 수많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느꼈을 소외와 불만의 경험에 대한 참된 종교적 반응이었다. 순교에 직면한 사람들은 신앙을 인내로서만 말하지 않고 떠남으로도 말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예수는 사실상 희생제물이 아닌 희생제물로 죽었다. 실제로는 제국에 의한 잔인한 처형이었지만 장소의 독재와 장소의 안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장소-없음의 미래를 받아들이고, 오히려 이를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