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을 넘어서] 예수 죽이기 (하나의 결론)

by 좋은만남 posted Apr 3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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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죽이기 (하나의 결론)


추종자들은 예수의 죽음이 비극이나 재앙이 아니라고 깨닫고, 그의 죽음을 삶에 연결시켜 집중하는 다양한 방법을 발전시켰다. 처음에는 단순히 대로마제국의 환상에 맞선 반체제 인사의 희생으로 말하였다. 이후 영광스러운 희생제물인 순교자의 죽음으로 제시하며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셨다고 믿었다. 제국 안에서 반체제적 목소리를 내며 힘겹게 살아온 바울과 주변인들은 예수의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실제로는 그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죽음이 증거하는 삶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추종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죄의 용서를 위해 한 사람이 희생제물이 되는 순교자 전통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모든 사회적 기반을 장소에 고착시킨 로마 문화적 상황에, 희생제물로서의 예수의 죽음이 희생제사가 허용된 장소로부터 그들을 제의적으로 해방할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예수의 몸을 희생제물로 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모두가 하나로 결집한 새로운 작은 공동체의 공동식사는, 노예, 성매매 여성, 상인, 학자, 국가 관리들이 동등하게 앉아 새로운 자기 정체성과 새로운 목적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제국의 상속자가 되게 하였다. 예수가 삶 속에서 민중들에게 의도했던 것들이 이제 제의적 형태로 변형되어 되살아난 것이다.
예수의 삶이 없었다면 부활 선언도 없었을 것이다. 부활하여 나타난 예수와의 만남은 예수 운동에 속한 사람들의 실제 경험이다. 추종자들은 먼저 예수를 알았고,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순교자로 믿었으며 그 대의를 신뢰했다. 예수의 삶과 행동이 그를 하나님의 의인 중 하나임을 드러냈고 하나님 뜻의 실천임을 믿게 했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은 예수가 살아낸 삶의 중요성을 선포하는 방식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의 삶이었고 그 삶이 하나님의 제국이라고 부른 삶의 비전을 알게 했다. 이 비전을 품은 사람은 십자가라도 죽일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나 신학자에게 우선적인 관심사가 아니다. 예수의 죽음 사건은 구체성을 상실하고 추상화되어, 죽음이라는 보편적 문제와 두려움에 처한 우리에게 영혼 불멸을 확신시켜주는 하나의 신화적인 사건이 되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포기할 의사도 전혀 없고, 하나님조차 망각한 죄인들에게까지 미치는 보편적인 구원사건이 된 것이다. 바울이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악한 세력에 의해 살해된 모든 사람을 부활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승리로 표현하는 유대 묵시종말론으로 이해한 것 때문에 이런 현상이 초래된 것 같지만,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그의 삶으로부터 분리하지는 않았고, 사랑과 서로 돌봄의 삶을 구체화할 ‘그리스도의 몸’ 공동체를 일궜다.
그러나 첫 세대가 사라지게 되자 권력 집단 간의 충돌이 더 부각되었고 그리스도의 능력은 유대인과 이슬람 등 이교도들에 대한 투쟁의 동력으로 사용되었다. 예수는 고대의 수많은 죽고 부활하는 구원자 신들 가운데 하나처럼 그 추종자들에게 이생과 내세에서의 안정을 보장해주는 존재가 되었고 오늘날 십자가는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를 위한 것이 되었다. 십자가도 하지 못한 예수의 처형을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하고 있다. 현자와 예언자는 그의 말과 행동으로 산다. 그런데 예수의 말과 행동은 삶의 길이 아닌 구원을 찾는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 오히려 힘과 특권으로 향유할 수 있는 삶을 위해 예수를 죽여야만 하는 것 같다. 사도신경의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구절 사이의 쉼표에 해당하는 (역사적) 예수는 더 고상한 어떤 소명에 의해 침묵 당한다.
초기 추종자들에게 예수는 실제로 살아있었고, 영적으로 그들과 현존했다. 오늘날 예수에 대해 여전히 말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가 어떤 형태로든 우리에게 새로운 제국의 비전을 제공하고 있고, 우리는 지금도 아주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새로운 제국에 초대되고 있다는 것을 뜻해야 한다. 그의 말과 행동을 도외시한다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수는 살아있을 수가 없다. 예수는 과거의 그들에게 살아있었을 때에만, 오늘의 우리에게도 살아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