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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기독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의 자리 : 유산이 없다 



필자는 EYCK에서 활동을 시작한 2007년부터 기독청년 운동의 찬란한 역사를 수없이 들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홍길동’ 같은 뛰어난 인물이 여럿 존재했다고들 한다. 걸출한 홍길동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면면도 화려하고 찬연했다. 군부독재라는 폭압이 강할수록 반작용도 강해져 그 시대는 그야말로 눈부셨다. 많은 방해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모였다. 전국대회를 하거나 연합수련회를 하면 1,000명 이상이 모였다고들 한다.

반면 2022년 오늘날의 현실은 당시의 10분의 1조차 모이기 힘들 정도로 초라하다. 30-40년 전의 기필코 버티겠다는 각오와 신앙고백이 기어이 공동체의 명맥을 잇고자 하는 발버둥과 씁쓸한 몸부림으로 변해버렸다. 이뿐인가. 각 교단 전국연합회의 임원들을 세우기조차 버거울 정도이니, 이 운동체를 유지하는 일에만도 많은 에너지를 투여해야 한다. 과거의 화려하고 찬연한 영광에 비하면, 현재의 조직들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처참하다. 폐허에 가깝다. 


감히 말하건대 2022년의 현실을 놓고 진단을 내릴 때, 에큐메니컬 청년 운동은 ‘실패’로 단정할 수 있다. 보통의 실패는 다시금 재도전하면 그만이지만 기독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의 실패는 그리 가볍게 인식하고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다. 그 ‘실패’가 재도전이나 재도약을 위한 웅크림이 아니라, 현재의 기독청년 활동가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묘한 일이 아닌가? 한 세대를 풍미한 그 많던 기독청년들은 왜 2022년에 모이지 않는 것인가?


현재의 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의 쇠퇴 원인에 대한 현실 진단을 아래와 같이 볼 수 있다면, 면죄부가 주어질 수 있을까?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가 급속도로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에 편입되면서 노동시장이 유연화되고, 무한경쟁 구도가 정교해졌으며, 공동체가 무너졌기때문에 우리들의 운동이 급격히 무너진 것인가? 아니면 오늘날 MZ세대가 철저하게 개인화되었기 때문에, 혹은 세대의 간극을 극복할 수 없어서 급격히 무너진 것인가? 오늘날 한국의 대형 교회들마저도 변화를 꾀하고 시대에 적응하려 안간힘을 쓴다. 이 모든 것을 시대적 문제로만 여기거나 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의 쇠퇴 이유로만 꼬집기에는, 존재 기반자체가 허물어지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결국 한국 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은 외딴섬이 되어버렸다. 생기 자체를 잃었다. 그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찬란했던 과거와 미약한 현재를 이을 수 있는 유일한 연결고리는 ‘유산’이다. 현재 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의 자리에 그 ‘유산’이 존재하는가?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에게 남은 유산은 없다. 정신적 가치이든, 물질적 가치이든 그 유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2022년 현재, 기독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과거의 성공은 현재의 성공과 연결되지 않는다. 과거의 족적은 현재의 발걸음이 아니다. 과거의 운동은 현재의 물결이 될 수 없다. 과거의 찬연함이 오늘날의 찬연함이 될 수 없다. 속상하게도 많은 이들의 노력과 헌신의 결과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과거 ‘고군분투’의 의미와 현재 ‘고군분투’의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이다. 군부독재하의 고군분투는 독립지사를 연상시키는 반면, 오늘날의 고군분투는 생존 게임인 것이다. 오늘날 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은 생존이 그 목표가 되었다. 청년 단체들은 매해 조직의 생존을 판가름해야 한다. 기존 EYCK와 KSCF의 임원들은 평신도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평신도 기독청년은 언감생심, 신학생 청년들도 만나기 어려울뿐더러,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임원들조차도 세우기 버거운 상황이 되었다. 그야말로 생존이다. 청년 단체의 특성상 1년 단위로 지도력이 교체된다. 공동체 내에 많은 청년이 있는 경우 잦은 지도력 교체는 역동적인 변화로 인식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그야말로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생존은 그 자체로 삶의 의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최선이다. 그러니 현재 기독청년 활동가들이나 임원들에게 매해 삶의 의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삶의 의지는 바로 나 자신이 이 단체의 생존을 책임질 수 있는지에 대한 생존 의지의 다른 말이다.

현재의 젊은 에큐메니스트들에게 승계할 유산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과거의 유산은 버팀목이 되며, 숭고한 동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면 과거의 유산은 극복해야 할 목표가 되기도 하고, 변주하거나 변형할 수 있는 좋은 틀거리와 재창조의 명분이 되기도 한다. 유산에는 사람을 이끄는 서사가 있고 매력이 있다. 유산은 청년들을 모을 수 있는 좋은 토대가 되기도 한다. 유산이 없는 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에는 헌신할 만한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운동의 급격한 쇠퇴로 나타났다. 


청년 에큐메니컬 운동에 헌신하게 하는 그 무엇이 없다. 그 무엇은 바로 소명이다. 소명은 생존경쟁으로 내모는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며, 신앙의 샘물이다. 그 소명은 유산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 유산을 계승할 때, 그 뜨거운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과거의 화려하고 찬연한 공동체가 아닐지라도, 심지어 많은 사람이 모이지 않더라도 유산의 전승이야말로 시대의 소외와 세대의 간극을 극복할 열쇠라고 믿는다. 그러나 계승되어야 할 그 유산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정신이 되었든, 물질이 되었든 말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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