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한 걸음을 걷고 싶은 날
함께 라오스 생활을 하다가 한국으로 귀환하시는 분의 환송회를 겸하여 1박2일의 짧은 일정으로 루앙프라방에 다녀왔다. 세계문화유산의 도시인 루앙파방(라오스식 발음)은 아직 코로나의 상처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듯, 여전히 한산한 거리와 문 닫힌 상점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나야 다시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을까..." 라는 푸념어린 생각을 내뱉으며 푸시산에 올랐을 때였다.
푸시산에서 바라보는 루앙프라방은 정말 아름다웠다. 사방이 높은 산지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 그 소담한 땅에 자리 잡은 도시를 메콩강과 칸강, 이 두 개의 강이 마치 포옹하듯 감싸고 있었다. 1353년 라오스 최초의 왕인 파웅움이 이 곳에 <란쌍왕국>의 도읍을 정할 때에도 필경 푸시에 올랐을 것이다.
사방으로 트여있는 산과 강과 하늘, 그리고 하염없이 어딘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면서 문득 "다시 일상으로 회복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의 회귀를 바라는 것일까? 푸시가 보여주는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은 변함없이 이어온 자신의 질서를 단 한 번도 배반한 적이 없고, 수백 년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도시 역시 끄떡하지 않고 힘주어 버티고 있는데 말이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겨우 여행객들로 인해 생겨나는 인위적인 번쩍임과 북적거림, 그리고 자본과 물질의 쉼 없는 순환을 다시금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고즈넉하고 한적한 이 곳의 평화로움을 비정상이라 단죄하며, 패키지 여행객의 노란깃발과 기념품 흥정의 소리로 떠들썩하게 하고선 거기에 '회복'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려는 것이다.
오늘 날의 우리들은 고작 100년 가까운 세월을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다보니, 물질만능이라는 탐욕에 취해 수백 수천 년을 이어온 놀라운 존재들 앞에서 결국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속내를 내비추곤 한다. 그 가벼움이라는 것은 한이 없어서 마치 세상 모든 것을 깃털조각으로 만들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다행인 것은 다음 날 새벽, 사람의 걸음이 갖고 있는 존재의 무직함 또한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 눈에 비친 탁밧 행렬은 그리 특별한 사람들의 걸음이 아니었고, 특정 종교만의 의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두 손을 모으고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쉼 없이 걷는 발걸음.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고, 그 나눈 것을 또 다시 나누는 하루의 시작을 바라보며 어쩌면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우리들의 세상이 이 정도로 유지되는 것은 세상 한켠에서 균형추의 역할을 하는 무직한 발걸음들이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쭈아(소년스님)와 공양을 하러 나온(다른 시각으로는 음식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소녀의 만남은 세상 그 어떤 이들의 발걸음 보다 더욱 묵직한 울림을 주는 듯하다.
나 역시 조금은 묵직한 걸음을 걷고 싶은 날이다.
* '푸시산'이라는 지명에서 실상 '푸'가 산이라는 뜻이기에 우리말로는 '시산'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테지만 글에서는 편의상 고유명사처럼 불리는 푸시산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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