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23.11.11 14:24

85. 아! 수학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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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아! 수학여행



1


교직원 회의(정확히는 전달회)를 위해 회의실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시작까지 7분여, 물론 영혼은 왼손에 니체의 『즐거운 지식』의 책등을 올려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앞마구리를 스르륵스르륵 두어 번. 길든 책입니다.

“선생님.”

분명하지는 않은 목소리는 분명히 지향된 소리.

“네?”와 “네.” 사이, 확신할 틈도 없이.

“수학여행 가셔야 합니다.” 1학년 부장 선생님입니다.

“네?”와 “네.” 사이, 의심할 틈도 없이.

“원래 가셨습니다.”

“네?”와 “네.” 사이의 대답밖에.


커피머신에 머그컵을 얹고 룽고를 한 번 누르고 세 번의 “네”에 설탕 대신 

“왜?, 뭐지?”를 넣어 다시 한 번 누르는 사이.

“수학여행 가시죠?” 다른 한 선생님입니다.

겨를도 없이, “네?”와 “네.”

짠듯한 “원래 가셨습니다.”

“근데 그 원래는 언제인가요?” 이제는 “네?”와 “네.” 사이 말고 물어야겠습니다.

“선생님 전 선생님 때?”

“제가 20년 가까이 되었으니 20년 만에 간다는 뜻이군요.” 

“네?”와 “네.” 사이가 토스 되었습니다.


이렇게 학년부 단톡방에 낑궈지고 한 시간이 멀다하고 걱정 많은 학년부 기획 선생님 ‘까톡’, ‘까톡까톡’. 무음이라 천만다행이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복도에서 만나는 톡방 선생님마다 첫 마디를, 

“보셨죠?” 

여권분실 대비, 주민등록등본을 기획 선생님께 제출해라.

“보셨죠?”

여행자보험 가입, 주민등록번호를 학년부 기획 선생님께 알려라.

“보셨죠?”

안 가는 또는 못 가는 학생 톡방에 올려라.


이렇게 누군가가 잃어버렸던(?) 20년의 한 사건이 복원되었습니다.


2


김포공항역, 게으름은 출구를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큰 걱정은 없습니다. 학교 후드집업을 따르면 됩니다. 그렇게도 입지 않아 점심시간 먼저 밥 먹이는 기준인 후드집업을 입고 온 아이들. 뒤통수를 놓칠세라 다른 뒤통수. 팔백여 명이 훌쩍 넘는 아이들 중 서넛의 뒤통수를 따르니 대합실입니다.


“주민등록등본 안 가져온 학생?” 김포 공항 3층이 시끄럽습니다. “안 가져온 학생?” 선생님들의 빡깊은 외침입니다. 약속이나 한 듯한 외침은 우리 학교 선생님들을 넘어 여기저기 메아리처럼 날아다닙니다. 미성년자인 학생들은 주민등록등본을 지참해야 합니다. 안 가져온 학생을 위해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미리 제출한 다른 한 장을 가지고 있으며 또 반드시 항공권을 잃어버릴 학생을 위해 사용될 것입니다. 

30여 명 우루루우루루 다니며 탑승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 한 시간도 안 되는 하늘을 날아 제주국제공항에 착륙했습니다. 우르르 짐을 찾아 조교라 불릴 가이드의 외침 “C조 저를 따라오세요.” 버스에 승차, 본격적으로 수학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공항엔 보이는 버스만 백여 대가 넘고 버스 앞 유리, LED 디스플레이창 또는 가로 A4 용지에 쓰인 학교 이름, 세어본 이름만 20여 개가 되는 그야말로 시즌입니다.


1일 차. 제주국제공항, 늘봄흑돼지(소고기 불고기, 밥만 무한 리필), 제주민속박물관(헐, 갔는데 휴관. 말도 안 되지만 그냥 다음으로), 제주4·3평화공원(제주민속박물관 휴관으로, 열리고 무료고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인 곳 급선택, 15분 만에 끝), 제주카트장(긴 카트장, 면허도 없는 아이들 운전실력 감탄사. 서바이벌 게임, 입으라 빌려준 군복이 카투사부터 특전사를 넘어 농부 쫄바지까지). 커큐민흑돼지(성산의 수학여행용 무한리필 삼겹살집), 라마다 제주 시티 호텔(다시 제주시로. 얘들아 제발 좀 자자)

2일 차. 제주제트(서귀포시, 20여 명 한 번에 타는 스피드 보트, 지구과학 주상절리를 눈으로), 박물관은살아있다(초딩용, 초딩 무시하지 말자), 항공우주박물관푸드팰리스(이 좋은 박물관에 밥만 먹으러), 오설록[제주의 녹차밭(있는 상점), 지갑아, 열려라!], 제주아트서커스(중국인 서커스, 다칠까 걱정), 수목원테마파크(다시 제주시, 실내 큰 오락실, 실내 얼음썰매장), 칠성뷔페(수학 여행 가장 비싸다는 식사)

3일 차. 일출랜드(다시 성산. 감귤 따기. 감귤은 야구용품이 아닌데. 동굴은 피곤한 이유로 감응패스), 성산일출봉(와우! 인파), 팔도강산(진짜 국적을 떠난 단체 관광용 식당). 제주국제공항(이륙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피곤).

수학여행 메모 모음.


3


“수학여행 총평?” 수학여행 후 첫 시간 질문입니다. 다른 시간에도 있었으려나.

“재미 없었어요.”

“넌 안 갔잖아.” 뭐야, 패스.

“뭐가 재미있었는데?”

대부분 제트보트입니다. 그리고 몰래 음료(?) 마신 이야기 아니 마시고 난 아이들에게 일어난 변화가 가져온 이야기입니다.

“왜 재미있었던 것 같니?”

조금 긴 침묵을 뚫고 “학교가 아니잖아요.”


“왜?” 이제 수학여행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공식 명칭은 ‘소규모테마형교육여행’입니다. 그리고 정의입니다. 

‘통제 위주였던 대규모 관광형 수학여행, 규모만 맞추던 형식적인 소집단 관람형 수학여행에서 벗어난, 「깊이 있는 체험과 배움을 통해 학생의 오감을 깨워주는 안전한 교육여행」으로 학교구성원 간의 토의․ 토론을 통해 관광‧관람에서 벗어나 다양한 체험거리로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사제동행을 실천하는 교육여행임과 동시에 교육과정과 연계하여 다양한 사회, 자연, 문화 등에 대한 직접 체험을 통해 살아 있는 지식을 배우기 위해 실시하는 1박 2일 이상의 숙박형 활동’

키워드는 ‘통제 위주’ 탈피, 관광이 아닌 체험 그리고 무엇보다 토의, 토론입니다. 토의와 토론을 통해 하고 싶은 것과 그래 갈 곳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 중에 학생들은 여행의 동기가 생기게 되고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이 괴리가 끝까지 수학여행으로 부르게 한 이유입니다.


다시 시작된 학교, 교직원 식당에서 20여 년 만에 가게 된 수학여행의 느낀 점을 묻기에 “선생님들의 어려움을 직접 보니 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좀 긴 한 마디 “왜?”를 말했습니다. 별 긴장감 없는 한 마디. 

“선생님, 낭만입니다.” 

테이블 가득한 침묵의 동의.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나누고 싶었던 꼰대(?) 이야기입니다. 


변화의 궁극적인 목적은 시스템 전체가 성공했을 때 결국은 그 수혜가 자신들에게 돌아오게 하는 데 있다. 의미의 추구는 달성하기는 어렵지만 끊임없이 좇아야 할 핵심이다. 의미는 동기부여가 되고, 동기부여는 에너지가 되며, 에너지는 참여를 낳고, 참여는 삶 그 자체이다. 삶이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깊고 충만한 의미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 마이클 풀란, 『학교개혁은 왜 실패하는가』, 이찬승, 은수진 공역 (교육을바꾸는책, 2017), 444쪽.


“네?”와 “네.” 사이, 수학여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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