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가능성의 영역을 남김없이 다 살려고 노력하라
1
“사진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니?”
스크린에 투사된 그림을 보며 아이들은 자유롭게(?) 느낌을 말합니다. “짜장면?” 태우를 부르는 방법입니다.
“곰이 멱살을 잡혔어요.”
“사자거든.”
이렇게 시작한 학급은 흐름이 있습니다.
“꼬리가 땅에 끌려서 피날 거 같아요.”
“곰의 포기한 눈빛을 보세요.”
“사자라고.”
결론입니다.
“동물 학대에요.”
이를 멈추기 위해서는 주모자를 색출해야 합니다.
다른 학급입니다. “전 의원님?” 승민이를 불렀습니다.
“외로워 보여요,”
“어두워요.”
“힘들어 보여요.”
“왜 꼬마가 길 가는 거에요?”
멈추기 싫습니다. 정답이 아니라 스스로를 표현하게 해야 합니다.
“그럼 이 꼬마는 누굴까?”
아까부터 손을 들랑말랑하던 아이입니다.
“우리요.”
“우리?”
아이는 오른손 검지로 스스로를 가리킵니다.
2
시시포스(Σίσυφος)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 전설은 코린토스 시를 건설한 왕으로 그려집니다. 그는 잔꾀와 욕심이 많았으며, 여행자를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는 신들의 노여움으로 무거운 큰 돌을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했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돌은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그는 다시 돌을 정상으로 올리는 일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명확한 이유도 없이 계속해서.
프랑스 신문기자, 작가, 철학자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1942년 시시포스의 신화의 불어식 발음으로 『시지프 신화』라는 에세이를 씁니다. 에세이에서 우리는 카뮈의 철학을 읽을 수 있습니다.
큰 주제는 부조리(不條理, absurdism)입니다. 부조리는 불합리·배리(背理)·모순·불가해(不可解) 등을 뜻하는 단어로서, 철학에서는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을 뜻합니다. 카뮈는 끊임없이 굴러떨어지는 돌을 정상으로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형벌에서 부조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도 어쩔 수 없고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설명입니다. 간단하지만은 않은 그의 철학은 제안합니다. 삶의 부조리로부터 도피하지 말라. 떨어질 돌을 묵묵히 다시 올리는 시시포스의 고귀한 성실을 따라 노력하기, 그 자체에 의미를 두라.
시시포스처럼 꼬마 아이는 길에서 도피할 수 없습니다. 꼬마는 사자 인형을 들고 묵묵히 걷고 있고 걸을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입니다.
3
종교학과 신학의 차이를 물으면 그 주요 관심을 말합니다. 신학의 주요 관심이 신이라면 종교학의 주요 관심은 인간입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이해 없이는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종교학은 인간학이라 합니다.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 그 구성인 내용, 경전, 공동체, 교리, 윤리 등을 살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본질적인 것은 그것에 관심하고 실행한 인간에 대한 이해입니다. 왜 인간은 종교하고 있는가? 종교해야만 하는가 또는 종교적인가? 바로 종교적 인간 이해의 필요성이며 종교학의 시작입니다.
“오, 나의 영혼아, 불멸의 삶을 갈망하지 말고 가능성의 영역을 남김없이 다 살려고 노력하라.”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역 (민음사, 2016).
종교하기를 제안하는 종교학 첫 시간, 카뮈를 인용합니다. 그리고 이제 오므린 오른손 검지가 다른 손가락들과 함께 움켜쥔 주먹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