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이슬람의 윤리적 실천, 정언명령의 종교
1. 이슬람
이슬람교는 ‘알라(Allah)’ 곧 유일신(唯一神) 하느님 중심입니다.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고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슬람(Islam)’은 하느님에 대한 순종을 뜻하며, 순종의 결과는 살람(Salām), ‘평화’입니다. 또한, 무슬림은 곧 하느님에게 순종하여 평화를 얻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 순종해야 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칼리파(Khalīfah)’, ‘대리인’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하느님과 하느님이 보낸 예언자를 믿어야 하며,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 의무는 하느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 하느님이 준 것을 베푸는 것,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꾸란』에서 제시하는 의무는 내세의 행복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알라)과의 약속을 지키고 계약을 파기(破棄)하지 않는 자. 하느님(알라)께서 맺도록 명령한 것을 맺고 주를 공경하고 악의 응보를 두려워하는 자. 주의 얼굴을 뵙기 위해 참고 견디고 예배를 지켜 드리고 우리들이 준 것을 살며시 혹은 공연히 베풀어 주고 선으로 악을 격퇴하는 자, 이런 사람들에게야말로 마지막의 거처(居處)가 있다. 즉 에덴 동산이다.”
- 『꾸란』 13장 20-23절.
2. 이슬람의 공동체, 움마
『꾸란』에서 ‘움마(Ummah)’는 기본적으로는 이슬람교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이 의미는 먼저 『꾸란』과 『하디스』(무함마의 말과 행동을 담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법적, 정치적, 국가적 의미로 발전되었습니다. 오늘날 ‘움마’는 이슬람 국가와 영토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뜻하며, 현대 아랍어에서는 ‘국가’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이슬람 공동체 ‘움마’가 만들어진 배경은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핍박을 받고 메디나로 이주한 후,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함께 메디나로 도피한 이후 시작되었으며, 오늘날 이슬람교를 성립하게 하는 연대입니다.
‘움마’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움마’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꾸란』 3장 110절에서 ‘움마’는 인류를 위해 나타난 가장 좋은 사람들의 모임이며, 바른 일과 추악한 것을 금하고 하느님(알라)을 믿는 이들이라는 신앙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꾸란』 6장 38절에는 온 땅의 짐승, 날개로 나는 새와 같이 사람들 역시 집단을 이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움마’가 가진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움마’는 종교적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꾸란』 2장 143절은 무함마드를 따르는 자를 구별하기 위해 예배 때에 향하는 방향인 각도(키블라)를 정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인도하여 모이는 곳이 바로 ‘움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대들을 중간 위치의 민족으로 하였다.”는 『꾸란』의 구절은 이슬람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또한 하느님을 따라 중간 위치의 민족 곧 세계의 중심지, 정의와 균형의 모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의 공동체 ‘움마’는 하느님과 무함마드 선지자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하느님과 무함마드의 교훈에 따른 의무를 실행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며 종교적 공동체로서 이슬람교의 윤리적 실천의 주체라 할 수 있습니다.
3. 가난한 자와 함께. 자카트
“믿으며 좋은 일을 행하고 예배의 의무를 지키고 희사(자카트)를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주의 보답이 있을 것이며 두려움도 슬픔도 없을 것이다.” - 『꾸란』, 2장 277절.
무슬림에게 기도는 신앙 고백을 드러내는 것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동시에 사회적 기도는 기도의 의미를 더하는 실천입니다. 이슬람교의 윤리는 하느님과의 관계만을 지향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과 함께하는 자세를 포함합니다.
‘자카트’의 본래 의미는 ‘자카(zakka)’, ‘깨끗하게 하다’라는 의미에서 ‘정화’입니다. 법적인 의미는 ‘부에 대한 권리’ 또는 ‘수혜자에게 제공되도록 하느님(알라)에 의해 명시된 부의 일종’입니다. 이슬람의 신앙의 5대 지주의 하나로 일반적으로 ‘희사’로 번역합니다. ‘자카트’는 자선, 희사, 헌금, 세금, 기부 등의 개념뿐 아니라 윤리적 동기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꾸란』은 ‘자카트’의 수혜자를 분명하게 명시합니다. 정신적 육체적 장애를 가진 무슬림, 가난한 무슬림, 빚진 무슬림, 어려움에 처한 여행자, 새로 개종한 무슬림, 무슬림 전쟁 포로, 자카트 징수를 위해 임명된 고용인, 그리고 국가 비상시 국방비 또는 평상시 이슬람을 연구하고 전파하는 무슬림입니다.
‘자카트’의 동기는 분명합니다. 무슬림은 창조주가 선물한 모든 재물에 감사를 표현해야 하며, ‘자카트’는 신앙의 진지함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무슬림은 형제이며 자매로서, 사회적 기부를 통해 자신이 소홀히 했던 것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표현해야 합니다. 무슬림 공동체 움마는 연대의 공동체로서 무슬림은 적극적 베품을 통해 무슬림 사회의 상호 존중과 연대를 촉진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소유로 인정한다면, 인간은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보다 나은 분배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4. 이슬람 혐오에서 정언명령으로
“진짜요?”
그리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슬람 확산은 한국 안보에 치명타!!”, “이슬람 머니 받아들이면 강원도는 이슬람 식민지 된다”, “국민들은 할랄 타운이 테러범 양성소가 되는 것이 싫다”, “KBS는 오일머니에 무릎을 꿇었는가?”, “이슬람 돈에 눈이 멀면 한국 여성 강간 피해자 늘어나고 강원도에 테러리스트 소굴 생겨난다”, “이슬람 특혜 반대, 할랄 단지 조성 반대”, “이슬람교인은 칼을 쓰면 10억, 칼 없으면 100명”, “할랄 도축장 절대 반대”, “세계인의 치를 떨게 하는 무슬림 IS테러로부터 우리나라를 지키자”, “이슬람 머니 속임수에 금수강산 넘어간다”, “유럽 실패 교훈삼아 이슬람을 경계하라!” 아이들에게 노출된 언론의 이슬람입니다. 이 정도 노출이면 혐오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해 보입니다.
궁금한 건 “왜?”입니다.
“체계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히 낯설고 소원한 것에 반발하며, 이러한 반발은 낯선 것이 여전히 생각할 만하고 참된 것이라 하더라도 이와 상관없이 일어난다. 낯선 것이 잘 추론된 고유한 것의 계열을 파괴시킬 수 있으며 이 고유한 존재가 원래 자신의 자리로 요구하던 멋진 연관을 교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 슐라이어마허, 『종교론』, 최신한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9), 66쪽.
독일의 철학자, 신학자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78-1834). 이성의 폭력과 위험을 간파한 해석입니다. 다름은 근본 두려움이고 때문에 배제의 편리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배제의 정치(혐오의 정치, 편가르기)가 만연한 사회를 경험하며 더더욱 동의합니다.
“그래서 칸트의 조건 없는 명령, ‘정언명령’이란다. 그리고 다시 종교란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잖아 아니 이유가 없어야 하잖아.”
오늘은 더더욱 ‘정언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사랑의 명령 앞에서도 이기적 효용과 가능성을 묻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무도 쉽게 불가능이, 오히려 부끄러움 없이 당당히 선언됩니다. 정언명령은 가능성을 묻는 명령이 아닙니다. 당위성을 선언하는 명령입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에 ‘해야 한다’만 있는 것처럼. 그리고 더더욱 종교는 이 정언명령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 종교에 대한 비판은 정언명령을 따르지 않는 또는 못하는 종교에 대한 비판입니다.
“정말 그럴 수 있다구요?”
“그래야 하는 것 아닐까? 이게 맞지 않을까? 이슬람 사랑의 자카트가 신앙의 고백이고 동시에 실천인 것처럼. 이슬람을 읽어야 하는 이유란다.”
아이들이 종교로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and possibility)’을 보길 원합니다. 아이들은 보다 나은, 나아야 할 세계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꿈꾸는 이슬람을 나누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