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성스러운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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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당하는 심한 비극에 대하여 깊이 동정하면서 우리들은 하느님께서 위대한 루터의 백성을 통하여 어떤 의미심장한 창조적 작업을 예비하고 계시다는 묘한 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려운 난관과 위대한 희망이 교차하는 이 때에 하느님의 축복이 독일과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독일을 이끌어 주시고 슬픔과 고통을 넘어서 올바른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루돌프 옷토, 『성스러움의 의미』, 길희성 옮김 (분도출판사, 2018), 29.
루돌프 옷토(Rudolf Otto, 1869~1937)가 쓴 『성스러움의 의미』의 1936년
「저자 서문」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한 놀웨이 목사는 옷토의 『성스러움의 의미』를 읽고 옷토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옷토가 재판의 서문을 다시 쓰며, 한 놀웨이 목사 서한을 인용하는데, 이 구절은 종교학이란 학문을 넘어 종교학 학문 자체가 주는 가치로 이끕니다. 1917년 초판에서 옷토가 이것을 목적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1차 세계대전은 1914년 발발 1918년 종전한 세계대전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900만 명 이상의 병사가 사망한 인류의 커다란 아픔이었습니다. 이 전쟁 후 사람들은 그간에 가졌던 낭만적 역사관에 대해 비판합니다. 이성의 성숙, 과학의 발전은 인류에게 가져오리라 믿었던 희망이 송두리째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독일이 당하는 심한 비극에 대하여 깊이 동정하면서 우리들은 하느님께서 위대한 루터의 백성을 통하여 어떤 의미심장한 창조적 작업을 예비하고 계시다는 묘한 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놀웨이 목사는 독일의 심한 비극에서 묘한 확신을 옷토의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발견한 듯합니다. 이성, 과학과 그리고 진보가 밀어낸 ‘성스러움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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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종교적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하나의 고유한 가치평가의 행위이다. 이 가치평가는 곧 다른 영역으로, 예를 들어 윤리로 파급되어 가지만 그 자체는 다른 영역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전적으로 특이한 종류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이 요소는 위에 말한 뜻에서의 합리적인 것을 벗어나며 개념적 파악으로는 전혀 접근할 수 없는 하나의 불가언적(arrēton)인 것이다.
- 루돌프 옷토, 37.
옷토는 성스러움에 대한 인지에 주목합니다. 그는 성스러움이 종교의 고유한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참됨, 선함,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그는 이에 더해 성스러움을 말합니다. 인간은 성스러움을 지향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성스러움은 종교학의 고유 영역입니다.
그런데 종교학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성스러움이 가진 특징 때문입니다. 성스러움은 합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개념으로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성스러움은 원인과 결과와 같은 이성적 판단 밖에 있으며, 성스러움의 현상들 속에 보편적 지식을 끌어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합리적이지 않다고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개념적 가치 밖에 있다는 것이 더 합당할 것입니다.
이제 성스러움의 인지입니다. 옷토는 “어떤 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일”을 말합니다. 인간은 어떤 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경험합니다. 이 성스러움은 신비롭고(mysterium), 떨리면서(tremendum) 매혹적인(fascinans) 것입니다. 이것은 성자의 삶에서, 대지를 뚫은 청보리의 새싹, 포근히 잠든 아기의 엄마 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옷토의 종교학은 그 ‘어떤 것’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떤 것을 ‘성스러운’ 것으로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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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전한 폭력과 야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옷토의 ‘성스러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보이는 것에만 의미를 두어 우리가 상실한 보이지 않는 가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것으로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스러움의 눈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래서 성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종교적 인간임을 각성할 수 있다면 그래 우리가 만나는 것에서 거룩함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것이 변화의 시작일 것입니다.
“성스러움이란 무엇인가?”
수업을 마치며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세상과의 구별됨이 성스러움인데 이 성스러움이라는 단어는 세상 속에 속한 사람들과 살아감으로써 증명이 될 수 있다. 즉 세상과 부딪치며 살아가지만 세상을 따르지 않음으로 거룩함이 유지될 수 있다.”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가는 것.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며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성스러운 아이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