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이었다.
서울 하월곡동 어두운 골목길에 허름한 신사복 차림을 한 한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마침 성탄 전야인데다가 날씨마저 추워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쓰러진 채 도움을 구하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이미 탈진 상태에 빠져 앓는 소리만 내었을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행인들이 한두 명 지나갔으나 그들은 노인을 못 본 척했다. 무심코 길바닥에 쓰러진 노인을 보고는 달아나듯 그 자리를 피해 갈 뿐이었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어 있었다. 노인은 더욱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 노인은 이대로 길에서 객사하는구나 하는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한 군밤 장수 사내가 손수레를 끌고 가다가 노인 앞에 멈춰 섰다.
"할아버지, 무슨 일입니까?"
노인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내는 급히 노인을 잡아 일으켰다. 노인은 거의 사색이 다 돼 있었다. 사내는 손수레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로 노인을 둘러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워낙 당뇨가 심하시군요."
응급처치하고 나온 의사가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의사의 말대로 조금 있자 사람을 알아볼 정도로 기력을 회복했다.
"할아버지 전화번호를 말씀해 주세요. 제가 집에 연락해 드리겠어요."
사내는 노인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면서 연락처를 알아내 가족들에게 전화해주었다.
"여보게, 고맙네, 고마워. 어디 사는 누구인가?"
가족에게 연락을 하고 오자 노인이 사내의 손을 잡고 입을 열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그런 말씀은 마시고, 속히 안정을 취하시도록 하십시오."
"집이 어딘가? 좀 가르쳐 주게." "
그런 건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빨리 나으실 생각이나 하십시오."
"아니야. 집이 어딘지 꼭 좀 가르쳐 주게. 그래야 내가 나중에 인사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아닙니다. 전 그저 군밤 장수일 뿐입니다. 몸이 불편하신데 말씀 자꾸 하지 마시고 안정을 취하십시오."
노인이 몇 번이나 집을 가르쳐 달라고 했으나 사내는 자신이 군밤 장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노인의 가족들이 병원으로 달려왔을 때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노인은 건강이 회복된 후 군밤 장수를 찾아 나섰다. 하월곡동 시장 일대는 물론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골목이나 지하도 입구를 샅샅이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다녀도 군밤 장수를 찾을 수가 없었다. 노인은 찾다 못해 일간 신문에다 광고를 냈다.
"하월곡동 군밤 장수만 보시오. 요즘 보기 드문 한 군밤 장수를 찾습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 자정 넘은 시각에 하월곡동 골목에서 쓰러진 노인을 구해 준 고마운 군밤 장수에게 꼭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신문에 광고가 나가도 군밤 장수한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날 밤 노인을 돕느라 골목에 그대로 두었다가 손수레를 잃어버린 사내가 다시 손수레를 장만하기 위해 막노동을 하고 있는 줄을 그 노인이 알 리 없었다..
정호승의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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