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옛 종교들은 죽었는가_17. 우리는 선한 사람들, 나머지는 악한 사람들
사람들은 한쪽 편 들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선과 악,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사이의 상징적 대결은 종교의 신화, 장르 오락물, 어린이를 위한 영웅 이야기와 정치적 수사에서 수없이 등장한다. 세 가지 이야기에서 재료들을 찾을 수 있다. 우선 페르시아의 예언자인 자라투스트라(기원전 500년경)의 이원론적 신화이다. 자라투스트라는 영원한 선한 영인 아후라마즈다와 함께 짝을 이뤄 영원한 대결을 펼치는 악한 영인 앙그라 마이뉴가 있다고 가르쳤다. 이 둘의 갈등은 인간 역사의 지금 단계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조만간 마지막 전투에서 최고조에 달했다가 결국 선한 백성이 이길 것이며 완전히 새로워진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한다. 하느님 오른편과 왼편의 오랜 갈등, 하느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 영원한 형벌 같은 서방 신학의 기독교 교리들은 대부분 이 묵시록적 사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정치인들도 유권자 다수를 따로 떼어 그들을 결속시키고 정적들을 압도하게 될 운명이라고 확신을 갖게 하려고 이런 언어를 모방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인간의 사고가 어디서든 ‘이항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체계화한다는 제안이다. 위-아래, 남성-여성, 빛-어둠같이 모든 것이 ‘반대편’을 필요로 하고 ‘반대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에서의 이항적인 사고는 우리를 매우 이상한 오해로 이끌 수 있다. 인간 삶에 선한 힘이 작동한다면 당연히 악을 위한 힘도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선한 초자연적 질서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을 더욱 그럴듯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종교적인 논쟁에서도 항상 등장한다. 사람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종교에 대해 황당한 환상들을 갖게 된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 준다.
세 번째는 윤리이다. 평범하고 건강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도덕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언제나 선한 것을 선택하고 고수하지만, 악한 것을 분별하고 거절하는 등 도덕적으로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도덕적인 하느님은 재판관이시고 비평가이시며 분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선과 악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도덕적인 문제에 나서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생각을 요즘엔 ‘퓨리턴(puritan)’이라고 부른다. 교회는 인간의 약함과 다양성에 대해 관용하여 죄인들의 학교라고 보는 입장과 온전히 변화되어 의로운 성자들의 모임으로 보는 입장 사이의 오랜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둘 다 하느님이 악으로부터 결정적이고 최종적으로 분리한다는 견해는 같다. 그러나 ‘어떻게 무한히 거룩한 하느님이 자신이 만든 세상이 너무나도 불순하고 악한 것을 많이 포함하게 되는 것을 참을 수 있을까?’ 하는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만약 강력하고 실재론적이고 윤리적인 유신론자라면 ‘퓨리턴’이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삶의 종교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우리는 가능한 한 순수하게 보편적으로 긍정적이고 싶어 한다. 최대한 관대하고 한량없이 너그러우며, 외국이 혐오가 없는 형제애의 도시에서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대부분 종교가 세상을 선한 사람들과 신을 믿지 않고 부정하고 미개한 외부인들로 구분한다. 이것이 우리가 버려야 할 사고 유형이다. 나는 온전히 세계화된 새로운 종교는 아무런 구체화된 제도가 없는 것을 상상한다. 훈련받은 종교 전문가들로 구성된 핵심 권력층도 없고 내부자와 외부자로 세상을 나누려고 하지도 않는다. 유일한 기초는 그저 세계화된 인간들의 일상 대화이다. 그 영역에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삶의 종교로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