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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_ 4. 형이상학이 끝난 이후의 실재


우리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끈질기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가정 중 하나는 우리가 만들어졌으며, 이미 질서 정연하고 온전히 형태를 갖추어 시계 장치처럼 동작하고 있는 세상으로 우리가 들어오게 되었다는 가정이다. 이것을 믿는 이유는 우리 문화의 전통인 창조 신화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미 저절로 움직이고 있는, 온전한 형태를 갖춘 그런 세상을 그리스어로 코스모스라고 부른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권능이 코스모스의 객관적 실재를 보증하고 하느님의 지혜가 그 질서를 보증한다고 여긴다. 
플라톤은 눈에 보이고 안정되지 않은 세상의 ‘질료’와 질서를 부여하는 보편적 지적 원리인 보이지 않는 세상의 ‘형상’을 구분한다. 후대의 기독교 창조주는 훨씬 웅장하게도 무로부터 세상의 질료를 창조한다. 그리하여 우리 전통에서 주변에 이미 만들어진, 온전한 형태로 잘 돌아가는 세상이 있다는 믿음은 마침내(기원후 1215년) 순전히 신학적인 믿음이 되었고, 사도신경으로 확언되었다. 세상이 실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뉴턴의 물리학 이후 이런 논리와 믿음이 흔들려 하느님이 사망했다고 여겨졌음에도 과거의 실재론적 세상과 신학적 믿음은 유지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님 없이도 세상이 박살 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과학 이전의 사고에서는 신들이 우리를 안심시켰지만, 지금은 어떤 형태든 과거의 세상 속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 원칙이다. 우리가 거주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려면 세상은 다양한 방식으로 질서정연해야 한다. 신들을 믿던 시대에 사람들은 신들이 우리가 살기에 적합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지혜 가운데 수고를 다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신들이 떠나고 우리에게 남은 거라곤 과학적 세계상뿐인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고 세상의 가능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누구, 무엇인가? 
임마누엘 칸트는 1781년 ‘순수이성비판’을 출판하여 태초에 신들이 모든 것을 행했다는 창조신화 대신에, 우리가 어떻게 그 일을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에게 ‘개념’은 인간의 이해 속에 내재된 일반적인 생각과 규칙이고 ‘직관’은 단순히 경험에서 오는 미가공 자료인데, 모든 지식은 정신이 경험을 해석하는 것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즉 지식이 전적으로 경험 세계와 분리될 수 없고 ‘교리적 형이상학’은 죽었다는 뜻으로, 우리는 사물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절대 지식을 가질 수 없고 우리의 세상만 가질 뿐이다. 관점 없는 상태로 절대적 세상을 가질 수 없고 결코 세상을 넘어설 수 없다. 칸트는 우리가 어떤 세상을 가지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금 하는 것처럼 세상을 구축해야 하고, 그것을 객관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세기 뒤에 젊은 니체(다윈이후주의)는 “하느님은 죽었다. 사실은 없다. 해석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진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환상이다.”라고 말했다. 또 하이데거는 ‘1840년경 젊은 마르크스의 사상 속에서’ 형이상학이 명백하게 종말을 고하였다고 했다. 전통적 유신론은 하느님과 그의 피조세계, 그 안에 우리가 살 수 있다는 적합성과 하느님과 소통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에 대해 강력한 의식을 주었다. 세상의 역사는 하느님이 미리 정한 것으로 그렇게 일어나야만 했다는 예정론적이었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르네 데카르트에 의해 모든 것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수리 물리학으로 ‘객관적 실재성’을 증명하기 위해 새로운 과학을 적용하다가 혼란에 빠져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갔지만, 더 많은 의심을 품게 되었다. 니체 이후 철학은 점점 더 회의적이 되거나 잃어버린 ‘절대’에 대해 너무 초조해하지 않도록 설득할 방법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객관적 하느님과 객관적인 가치는 이슬람주의자들만이 믿는다. 그렇다면 보수주의자는 이슬람주의자들의 최후 승리를 환영해야 한다. 그 반대로 데카르트, 데리다, 보드리야르에 이르는 여정이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객관적 실재에 대한 걱정을 접고, 교리적 믿음을 포기해야 하며, 일상의 종교이자 세상을 예술로 다시 만드는 작업인 태양의 윤리를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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