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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제국의 권세들 (4)


◆ 제국 통치의 신격화 : 종교적 권세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고 종교를 개인적인 믿음으로 축소하는 태도를 가진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로마인들이 종교가 제국의 권세를 표명하는 것 중 하나로 변형된 것처럼, 로마에 복속된 도시와 시골에 있는 종교 역시 제국 권세의 한 형태로 바뀌었다. 고대 로마와 같은 헬라적 도시국가는 신정과 형상, 제의, 축제 등 시민적 혹은 정치적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신들은 도시국가의 삶을 결정하는, 의인화된 하늘, 땅, 풍요, 바다같이 중요한 자연적-문명적 권세들이었다. 제의와 올림픽 같은 경기들은 삶을 제공하거나 위협하는 권세들을 축하하고 그들과 연합하는 행사였다. 죽고 사는 일, 부, 도시국가의 일상적 삶은 이들 권세들의 호의에 달려 있었다. 종교는 권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사회의 권력관계를 대변하고 구성하는 데서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헬라 도시들과 기타 도시들은 자신들의 신전과 의식들을 로마 신(권세)에 봉헌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전쟁을 끝내고 내전에서 승리한 로마의 원수로서 세상에 평화와 번영, 구원을 가져왔다. 그는 구세주였다. 헬라 도시의 지배층은 도시의 종교를 바꾸었고 옛 신들의 형상 옆에 아우구스투스의 형상을 세웠으며 도시 중앙의 신전들 사이에 황제를 위한 사당을 지었다. 도심지는 제국의 신전에 초점을 맞춰 새롭게 꾸며졌고 경기의 이름도 바꾸는 등 공공장소 곳곳에 황제의 존재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달력을 황제의 생일에 맞춰 바꾸거나 황족의 복장과 머리 모양이 표본이 되기도 했다. 황제는 신들처럼 나체로 묘사되었고 군복이 입혀졌으며 어마어마한 크기로 표현되거나 황금으로 덧입혀졌다. 헬라인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와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동일시했다.
자신들의 도시에 삶의 질서를 포함해 세상의 평화와 안전을 가져온 제국의 통치 권력이 전통적으로 섬겨왔던 지역 영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지배층은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신들을 위해 사용했던 형태 안에서 표현해야만 했다. 그렇게 제도화되었다.
제국 권력관계들의 종교 형태는 사회경제적이며 정치적인 권력의 피라미드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공적인 삶의 리듬은 황제와 제국의 행사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제국의 축제들을 통해 부유한 보호자들은 도시 대중의 대다수인 극빈자들에게 고기를 먹을 기회를 제공했다. 헬라 도시의 부를 통제하는 가문들과 지역 행정관들과 도시 의회의 구성원들은 자신들과 자기들의 도시에 분명하게 이익이 된다는 점 때문에 황실의 후원을 조성함은 물론 황제숭배를 위한 제사장으로 봉사하며 제국의 사당과 신전, 게임, 축제들을 후원하였다. 
헤롯이 통치했던 팔레스타인처럼 덜 문명화된 지역에서도 황제를 기리는 일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헤롯의 경제 개발 프로젝트는 제국 권세의 종교적인 형태이자 표현이다. 그러나 두 가지 점에서 예루살렘 성전 국가는 헬라 도시국가와는 달랐다. 예루살렘 성전은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 건립되어 제국의 통치에 복종하는 제국의 통치를 대리하는 기관이었다. 헤롯은 다른 건축물과 달리 예루살렘 성전 재건 사업에는 더욱 신중하고 민감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성전이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중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전을 둘러싼 다른 건축물들은 그리스-로마식으로 지어졌고 로마의 권세를 선포하기 위한 독수리 형상이 성전의 주 출입구 위에 세워졌다. 
또 헬라 도시에서 황제숭배가 발전한 것과는 반대로, 성전에는 그 어떤 황제 형상도 세워지지 않았으며, 황제를 신들 중 하나로 여기며 그에게 직접 바치는 제사가 행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황제와 제국에 대한 충성(믿음)으로 요구된, 카이사르와 제국의 도시를 인격화한 로마를 위한 제사는 매일 행해졌다. 그나마도 이스라엘 전통에 헌신하는 사람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았다. 헤롯이 죽은 지 70년 후 황제를 위한 제사를 드리지 않기로 했을 때 그것은 분명 예루살렘 사람들과 로마인들 모두에게 독립선언으로 여겨졌다. 제국의 권세를 종교 형태로 구현한 것은 유다 지역에서 일시적으로 영향력이 있었을 뿐 깊게 뿌리내리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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