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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_ 2. 지식


과학시대 이전에는 인간이 자신을 이성적 질서가 부여되어 있고 통합된 세상인 ‘우주’ 안의 이미 만들어진 존재라고 결론 내린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때에는 세상을 어느 곳이든 조물주의 손길이 드러나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어디든 신의 이성, 즉 로고스, 신의 지혜, 신의 영이 스며들어 있는 것으로 이해한 것은 흔한 일이었다. 또한 세상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완벽한 지식 안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은 신적 정신의 유한한 형상(이미지)이자 짝으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아는 방식은, 하느님 자신이 만든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절대 지식에, 축소된 형태로 병행하고 동참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세상에 대한 우리 지식의 객관성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 
한때 ‘실재론’이라고 불리던 이 이론은 하느님의 세상 창조 교리에 의존했고 신학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 인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저 너머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 사이의 틈을 넘어서도록 했다. 그러나 새로운 수리물리학이 태어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과학은 궁극적 원인과 내재적 목적을 지워버렸고 우주를 잘 동작하는 시계 장치처럼 보게 됐다. 과학자는 지원금과 정치적인 이유로 실재론자여야 하고, 모든 형태의 실재론은 결국 유일신에 근거해야만 했기에, 물리학은 오늘날까지 내밀하게 신을 인정하는 형태로 남아 있다. 결국 그렇게 오늘날의 신학과 과학 사이의 권력관계가 형성되었다. 
18세기 들어 하느님의 절대적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의 관점 안에서만 지식의 객관성을 입증할 수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칸트는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방식으로 우리 세상을 구축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 지식의 객관성을 확인할 수는 없으며, 그저 우리 머리 안에서 실재론의 가정 위에서 작업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이 되면서 모두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우리가 공동 세상의 존재에 대한 가정과 우리 시대의 공통 언어로 표현된 우리 지식의 객관성에 동조하며, 이를 일종의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순전히 객체적인 실재나 진리는 없으며, 모든 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세상,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관점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머리에서 빠져나가 우리 세상과 절대 세상을 동시에 비교하며 볼 수 없다. 실제로 우리에게는 우리 세상밖에 없다. 우리가 과학적 방법과 과학적 세계상에 매달리는 이유는 어쨌든 그것이 매우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세상을 수용하고 거기에 동조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잘못된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변화를 수용하고 때로는 변화를 탐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현재 세계상이 영원한 진리로 드러날 것 같지도 않고 그동안의 선례로 보면 과학은 계속 변해왔고 또 변해갈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절대 지식에 참여한다고 믿고 그 진리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어 좋았던 시절로부터 먼 길을 거쳐 우리의 지식이 형성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약한’, 실용적이고 일시적인 지식만을 가졌을 뿐이고, 현재의 합의에 동조할 뿐이다. 일단 현재로선 이것이 잘 작동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로선 이것으로 작업을 진행하며, 바꿀 때가 되었다고 생각되면 바꾸게 될 것이다.오늘날 우리는 먼저 길을 찾고, 목적을 달성하고, 생존하는 데 유용한 것으로 입증된 기술들의 모음, 즉 지금의 지식을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 생의 주된 목적인 최고선이 지식의 일종이라는, 특히 신적이고 복을 주는 종류의 지식이며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지적 명상이라는 이전의 플라톤식 개념을 철학과 종교에서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철저히 세상 속으로 내려왔다. 나는 사랑과 창조적 작업으로 행복해진다. 장기적으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적 신앙이 삶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마음을 다해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태양처럼 살고 사랑해야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진리는 아니다. 유일한 진리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충분히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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