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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권력의 포기 (1)


권력은 그것을 휘두르는 사람을 매장한다. - 탈무드

1세기 유대인들은 로마의 오랜 지배 아래 평화를 잃었고 부조리와 무거운 세금, 종교적 감수성 무시로 분노하여 마침내 66년에 카이사리아에서 반란으로 폭발했다. 과거 마카비 시대의 회복을 꿈꾸며 독립과 종교적 자유를 되찾기 위해 싸웠고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갈릴 지역을 찾은 역사가 요세푸스의 눈에는 절망적으로 보였다. 주민들 일부는 무장반란에 찬성하였지만, 일부는 반대하였는데 67년에 로마의 포위를 당하자 두 달을 버티다 모두 자결하였다.
요세푸스가 묘사한 전쟁 모습은 절망적인 파벌주의였다. 성전 및 정치권력과 연관된 상류층 사두개파와 경건주의 집단으로서 쿰란 종파와 관계 있는 에세네파, 율법의 구전전승과 엄격한 율법 준수를 고수한 집단인 바리새파의 세 집단이다. 게다가 바리새파는 내부적으로 또 분열돼 있었다. 종교적 갈등을 가로질러 전쟁을 선호한 극단주의자들과 로마와 화해해야 한다는 온건주의자들의 정치적 충돌이 극심했다. 정말 소름기치는 것은 예루살렘이 포위당했을 때는 2만5천 명의 유대인들이 잘 훈련된 6만 명의 로마군대와 맞서는 중에도 열심당원, 극단주의 분파, 아두매인과 여타의 제3 세력으로 분열돼 있었다. 이들은 서로를 죽이고 식량 보급을 차단하며 ‘자살적 투쟁’에 몰두하였다. 
예루살렘 함락이 21세기 정치와 연관성을 갖는 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종교적인 동기에서 비롯되는 테러를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테러리스트들은 단검을 품고 다니던 ‘시카리파’로 불렸다. 그들의 목표는 지역 주민들과 점령세력 사이의 관계에 불을 지르고, 공포 분위기를 만들고, 양편 모두에게 서로 보복하도록 선동함으로써 충돌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었다.
65년 후 다시 반란으로 유대인의 삶은 폐허가 되었다. 성전은 파괴되고 예루살렘은 완전히 무너졌으며 유대인들은 바빌론, 이집트, 지중해 연안 등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유배생활이 거의 2천 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 비극이 더욱 컸던 이유는 자충수 때문이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과 유대인들의 삶을 구성했던 기관들, 함께 모여 살던 민족, 집단의 고향, 주권도 없어졌고 제사장들, 예언자들, 왕들의 시대도 사라졌으며 성전과 희생제사도 더 이상 없었다. 유대인들은 다시 정치적으로 조직할 수 없었다.
이런 때에 유대인들은 종교가 권력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성전 대신 회당을 가졌고 희생제사 대신 기도와 자선활동을 했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하던 일은 회개를 통해 마음을 직접 하나님께 향하게 했다. 민족국가 대신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진 채, 상호 책임의 언약 관계로 연합된 공동체를 이루며 전 지구적 백성이 되었다. 랍비들은 왕, 제사장, 예언자들이 하지 못한 것을 성취했고, 우상숭배의 유혹에 빠져 길을 벗어나던 백성은 이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는 ‘하나님께 중독된 민족’이 되었다. 어디에서나 소수자들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했으며, 지배문화에 동화되거나 다수의 종교로 개종하지 않은 채 살아남은, 역사상 유일한 소수민족이 되었다. 이는 유대인들이 국가와 정치적 자결 능력이 없이도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것은, 비록 종교와 권력이 각각 나름의 방식과 의미에서 모두 정치적이라 할지라도, 결국 종교와 권력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문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1500년 후에 기독교인들도 똑같은 것을 발견했다. 1517년 젊은 사제 마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임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르네상스 교황청의 부태와 타락, 그 세속적인 모습과 권력 남용에 분노한 루터의 메시지는 헬레니즘에 물든 유대인을 반대하고 신앙의 본질과 단순한 열정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던 열심당, 마카비 형제들 및 그 계승자들과 비슷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였다. 종교개혁은 유럽의 정치적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운동을 시작하여, 로마 교황청의 권위와 권력에 도전했고 1세기 후 전쟁을 거치며 17세기에 유럽의 근대를 탄생시켰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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