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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폭력과 정체성 (4)


(이어서) 처음 만나는 이런 문명 질서를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종교를 대체했던 민족주의, 공산주의, 인종이라는 대체물이 실패한 끔찍한 트라우마에 비춰보는 길이다. 우리는 1970년대 이후 개인주의의 욕구불만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정체성 문제는 되돌아왔다. 충돌의 옛 원천이었던 종교와 민족은 지금 새로운 희생자들을 낳고 있다. 근대를 반대하는 급진주의자들은 근대의 산물을 생산한 서구화 과정을 거치지 않는 방법을 배웠고, 그사이 서양의 에너지는 고갈되었다. 종교가 한때 에너지를 불어넣었던 혼인, 가족, 공동체, 도덕규범의 공유, 본능 충족의 절제 능력, 부자와 빈민을 상호 책임의 유대관계로 연결해주는 계약, 희망이라는 사회적 미덕을 낳은 우주에 대한 비전 등이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집단을 형성하려는 경향에서 종교는 가장 효과적인 동력인데, 그런 집단 형성 경향이 폭력과 전쟁의 원천이다. 그러나 대안이 되는 것, 즉 집단이나 정체성 없는 인류라는 대안이 불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견딜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도덕규범을 상실한 사회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자살한다. 우리는 공공의 의미와 집단적인 도덕적 정체성이 없는 상태를 견디지 못하고 미래에 직면하여 취약한 개인들은 삶보다 죽음을 택한다.
9.11테러 이후의 연구자료는 자살 폭탄범들이 대부분 빈곤이나 사회적 배제, 정신질환이나 극단주의 추종 때문이 아님을 밝혔다. 그들은 오늘날 서양과 이슬람 세계의 타락한 세속 정권의 공허감, 무의미, 물질주의, 나르시시즘으로 고난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개인들이 급진주의 운동에 가담하는 이유는 외로운 군중의 고립감에서 벗어나고, 잠시 동안만이라도 자기보다 더 큰 무엇을 추구하는 일에 종사하는 격렬한 공동체의 일부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진정한 이상이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세상의 불의를 종식시키고,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을 명예롭게 하는 일에 헌신하려는 것이다. “정치적 테러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윤리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숭배, 극단적이며 절대적인 존경의 표현이다.”(전사의 명예/마이클 이그나티프) 선과 악, 이타주의와 공격성, 평화와 폭력, 사랑과 증오는 모두 우리 자신을 ‘그들’에 맞서는 ‘우리’로 규정하려는 필요성이 낳은 쌍둥이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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