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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권력에게 진실을 말하다 (3)


◆ 정면대결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단순히 유월절 축제 순례 때문이 아니었고 성전을 정화한 것도 즉흥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이스라엘 전승에 따르면 예언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이스라엘 통치자에 맞서 예언하는 것이었고 예수는 예언자로서 통치자들, 통치 제도와 대결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여행한 것이다. 로마 총독들의 통치 아래서 진행된 유월절 축제는 이미 대결 상황에 놓여있었다. 이집트의 통치자들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축하하는 유월절 축제가 현재는 제국 지배의 물리적인 힘들과 병합된 행사가 되었으니 이 축제는 봉기로 전환될 잠재성이 언제나 존재했다. 축제 시기에 로마가 추가로 배치한 군대는 민중을 자극했고 정치종교적 측면에서 극히 격앙된 상태로 만들었다. 
예수의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은 그의 대중적 메시야 역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행위로 익명성과 위장을 통한 정치적 대결 행위의 신랄한 역할극이자 시위였다. 예수가 탄 나귀는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기름부음을 받은 대중적 왕이라는 스가랴의 예언을, 길가에 펼쳐진 겉옷과 나뭇가지들은 아합과 이세벨의 통치를 전복할 예후라는 새로운 왕에 대한 환영을 연상시켰고, 추종자들이 외친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다. 예수와 그 추종자들은 분명히 유월절 축제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여정의 일부로 그 퍼포먼스를 행했다. 비유나 의미가 숨겨진 연설들을 통해 선포되는 예언으로 가장된 어설픈 행동이 폭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으나 대제사장들은 군중의 분노가 더 많이 표출되는 것을 피하려고 몰래 조치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예수의 예언들은 로마 총독이 그에게 십자가 처형을 선고하도록 자극한 필연적인 행위들은 아니었다. 나사렛 예수는 시골에서 올라와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했던 유일한 예언자가 아니었다. 60년대 후반, 시골 출신 예언자인 하나냐의 아들 예수도 성전 뜰에서 7년이나 예언자적 애가를 불렀다. 대제사장들은 그의 예언이 예루살렘과 성전에 맞서는 것임을 알고 로마 총독에게 처형을 부추겼으나 총독은 로마제국 질서에 실제적인 위협을 주지 않는 미치광이로 인식했다. 즉 성전과 예루살렘을 향한 나사렛 예수의 유죄선고는 로마제국 질서에 상당한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는 홀로 활동하는 신탁 예언자와는 달리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었고,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유죄선고를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강압적 시위를 벌였다는 점에서 달랐다. 예수가 공격했던 것은 부패한 행위가 아니라 희생제사를 위한 성전의 일반적 상거래 행위로,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거룩한 제도와 신성에 대한 모독이었다. 또 성전은 유다 지방 정치경제의 중심 제도이자 사제귀족 권력의 토대였으며 로마제국의 통치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예수의 행위는 로마제국 질서에 대한 노골적 방해와 도전에 해당하였다.
예수는 성전 관리들을 민중의 재화를 강탈하고 산으로 피신하는 계약 계명 위반자로 규정한 예레미야와 이사야의 전통을 따라,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유죄선고를 했다. 예수의 포도원 소작농 비유도 대제사장 통치자들을 겨냥한다. 헤롯 가문과 마찬가지로 대출에 대해 저당 잡은 토지를 압류함으로 대토지를 소유하게 된 대제사장 가문을 포도원 돌보는 책임을 맡은 자들로 고발한다. 반항적인 소작농들이 징벌받는다는 이야기가 그들에게 그럴듯하게 들렸겠지만, 곧 자신들을 고발하는 것임을 안 대제사장들은 예수를 체포하기로 결의한다.
예수의 적대자들은 로마의 조세 문제로 덫을 놓았다. 카이사르에게 바치는 조세가 두 계명 위반의 불법이라는 것을 바리새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조세 납부 거부를 명시적으로 선언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예수는 영리하게 빠져나갔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예수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들은 사람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카이사르에게 속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조세 거부는 로마 통치에 대한 반역 선동으로 간주해 처형당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예수의 교묘한 표현은 무력에 호소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로마 통치로부터의 독립과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사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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